요리를 한다는 것
#지난 1월 13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2>의 막이 내렸습니다. 우승자는 백수저 최강록. 그는 기세등등했던 흑수저 '요리괴물' 이하성을 꺾고 3억 원의 상금을 거머쥐었습니다. 단순히 돈의 액수보다 무거운 것은, 그가 보여준 요리사의 '등 뒤'였습니다.
#지난 1월 13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2>의 막이 내렸습니다. 우승자는 백수저 최강록. 그는 기세등등했던 흑수저 '요리괴물' 이하성을 꺾고 3억 원의 상금을 거머쥐었습니다. 단순히 돈의 액수보다 무거운 것은, 그가 보여준 요리사의 '등 뒤'였습니다.
결승전이라는 극도의 압박 속에서 그는 화려한 기교를 과감히 덜어냈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깨를 볶고 갈아 두부를 빚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게을러지지 않겠다는 자기 점검의 의미"라고 그는 나직이 말했습니다. 남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소스에 매달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을 택한 셈입니다. 사실 요리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시간도, 경쟁자도 아닌 '이 정도면 됐다'는 나태입니다. 팔을 멈추지 않고 젓고 또 젓는 그 정직한 노동이야말로 최강록이 세상에 던진 출사표였습니다.
#우승 소감은 그의 요리만큼이나 담백하고 깊었습니다. "결승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면 요리괴물님이 훨씬 더 멋진 음식을 냈을 겁니다. 저는 그저 전국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리사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앞세우는 그 태도에서, 우리는 잘 익은 장맛 같은 인격의 성숙함을 봅니다. 이기고도 지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 그것이 진짜 고수의 품격입니다.
그는 일찍이 그의 저서 <요리를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중요한 것은 먹는 사람을 향한 다정한 마음이다." 결국 요리의 끝은 혀끝이 아니라 마음(心)에 닿아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비단 요리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업(業)이나 투자 역시, 그 본질의 뿌리는 결국 상대를 향한 진심에 닿아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그의 굽은 뒷모습을 보며 저도 거울 앞에 섭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의업(醫業)의 본질은 결국 환자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저는 차가운 청진기 대신 뜨거운 주방의 열기 속에서 다시 배웁니다. 때로는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이 수백 권의 의학 서적보다 더 날카로운 화두를 제 삶에 던지곤 합니다. 제가 드라마를 놓지 못하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결승전이라는 극도의 압박 속에서 그는 화려한 기교를 과감히 덜어냈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깨를 볶고 갈아 두부를 빚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게을러지지 않겠다는 자기 점검의 의미"라고 그는 나직이 말했습니다. 남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소스에 매달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을 택한 셈입니다. 사실 요리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시간도, 경쟁자도 아닌 '이 정도면 됐다'는 나태입니다. 팔을 멈추지 않고 젓고 또 젓는 그 정직한 노동이야말로 최강록이 세상에 던진 출사표였습니다.
#우승 소감은 그의 요리만큼이나 담백하고 깊었습니다. "결승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면 요리괴물님이 훨씬 더 멋진 음식을 냈을 겁니다. 저는 그저 전국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리사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앞세우는 그 태도에서, 우리는 잘 익은 장맛 같은 인격의 성숙함을 봅니다. 이기고도 지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 그것이 진짜 고수의 품격입니다.
그는 일찍이 그의 저서 <요리를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중요한 것은 먹는 사람을 향한 다정한 마음이다." 결국 요리의 끝은 혀끝이 아니라 마음(心)에 닿아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비단 요리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업(業)이나 투자 역시, 그 본질의 뿌리는 결국 상대를 향한 진심에 닿아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그의 굽은 뒷모습을 보며 저도 거울 앞에 섭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의업(醫業)의 본질은 결국 환자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저는 차가운 청진기 대신 뜨거운 주방의 열기 속에서 다시 배웁니다. 때로는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이 수백 권의 의학 서적보다 더 날카로운 화두를 제 삶에 던지곤 합니다. 제가 드라마를 놓지 못하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웃음과 눈물

#토요일 조간 신문 한구석에 스페인 론다(Ronda)의 여행 기사가 실렸다. 론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투우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기사를 보자마자 2012년 11월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때 친구 부부들과 함께 그 붉은 흙 위에 서 있었다.
그날의 하늘은 눈이 부시다 못해 시렸다. 단순히 파랗다는 말로는 그 깊이를 담을 수 없었다. 잘 닦인 청사기 그릇처럼 매끄럽고, 차갑고, 단단했다. 손 끝을 대면 쨍하고 깨질 것 같은 그 맑은 고요함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의 가이드는 천생 재간꾼이었다. 그의 입술 끝에서 스페인의 뜨거운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소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그의 손짓에 투우장의 팽팽한 에너지가 되살아났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은 고압의 긴장감이었다.
성난 소가 거친 숨을 내뱉는다.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김이 대기를 갈랐다. 씩씩거리는 그 소리는 성난 증기기관차처럼 우리에게까지 육중하게 전달되었다. 앞다리가 마른 땅을 훑을 때마다 붉은 흙더미가 뒤로 튀어 올랐다. 바닥을 긁어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은 생을 건 마지막 경고였다.
돌격 직전,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온다. 소의 머리는 낮게 가라앉고, 목덜미의 근육은 험준한 산맥처럼 솟구쳤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투우사의 붉은 천, '무레타'를 향해 자신의 온 생을 내던지는 일뿐이다. 가이드의 이 리얼한 묘사에 우리는 배꼽이 공중제비를 돌 정도로 크게 웃었다. 론다의 햇살 아래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사진 속 일행 중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여전히 환하게,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웃고 있다. 그리움은 늘 소금기처럼 짜고, 시리게 찾아온다. 보고 싶다는 말은 목구멍의 턱에 걸려 자꾸만 안으로 삼켜졌다.
그때 그 시절의 우리는 참으로 다정했다. 함께 나누던 공기는 화덕에서 막 꺼낸 빵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던 그 밤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그날의 풍경은 론다의 하늘보다 더 선명한 색채로 가슴에 남았다.
웃음으로 시작해 눈물로 끝맺는 기억이지만, 그 기억이 있어 나의 오늘은 여전히 따뜻하다
 
미소라는 이름의 처방전

진료실의 공기는 늘 팽팽하다.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 환자의 피부에 닿을 때, 그 무게는 질병과 불안으로 더욱 무거워진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늘 먼저 미소를 건넨다. 입가의 근육을 살짝 올리는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공기 중의 결을 부드럽게 풀어낸다. 미소는 나의 첫 번째 진료 도구다.

최근 ‘하트미소 명상’을 익히고 있다.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탐구하는 카이스트의 이들까지 이 명상에 주목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방법은 간단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 온기를 가슴 한가운데로 천천히 내려보낸다. 따뜻한 파장이 심장을 훈훈하게 적시고, 손끝과 발끝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냉철한 두뇌도 결국 몸의 언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그 원리는 명료하다.' 움직임(Motion)이 감정(Emotion)을 만들고, 몸이 마음을 앞선다. '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행위 자체가 뇌에게 즐거움의 신호를 보낸다. 우리의 신경계는 생각보다 순진해서, 얼굴 근육의 미묘한 변화에도 기꺼이 반응하며 세로토닌을 내보낸다. 미소는, 그래서 의학적으로도 완벽한 자연치유의 열쇠다.

얼굴의 미소가 가슴의 미소로 깊어질 때, 변화는 더욱 선명해진다. 환자의 숨결이 가라앉고, 경직된 표정에 살짝 빛이 스민다. 수많은 증상과 검사 결과를 살피는 일상 속에서, 내가 발견한 가장 소중한 진리는 이것이다. 삶의 진정한 건강은 격정의 순간보다, 고요히 스며드는 평온에 기반한다는 사실.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온기를 품고 환자를 마주하는 것. 그것은 그 어떤 정교한 처방보다 확실한 치유의 시작이다. 미소는 나를 따뜻하게 데운 다음, 그 열기로 상대의 얼어붙은 불안을 서서히 녹여낸다. 이것이 내가 매일 나 자신과 모든 이에게 건네는, 가장 부드럽고 확실한 처방이다.
 
단골식당


#삼십 년 세월이 눅진하게 고인 지하 식당은 지상과는 다른 밀도의 공기가 흘렀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지상의 소음은 여과되고, 그 빈자리를 멸치 육수의 깊은 감칠맛과 갓 볶아낸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층층이 메웠다. 일주일에 세 번, 나는 의례처럼 그 어스름한 계단을 밟았다. 식탁 앞에 앉기가 무섭게 여사장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큼지막한 양푼을 내밀었다. 그곳은 물가 상승이라는 세상의 풍파를 비껴간 채, 칠천 원이라는 숫자가 도리어 미안해지는 성지였다.

이 집의 명물은 단연 제육볶음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빤한 학생들에게 그 붉은 고기는 단순한 반찬을 넘어 하루를 버티게 하는 생존의 연료였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고기 너머, 정갈하게 놓인 나물 바구니로 향하곤 했다. 사장님이 새벽부터 손수 다듬고 무친 고사리, 도라지, 취나물들. 그 산의 정취를 한데 모아 비빔밥을 슥슥 비빌 때면, 그것은 식사를 넘어 대지의 기운을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경건한 의식이 되었다.

#사장님은 내 비빔밥 위로 늘 계란 프라이 하나를 '툭' 하고 무심하게 얹어주었다. 뒤이어 낡은 병에 담긴 참기름을 아낌없이 둘렀다. "많이 드세요." 그 투박한 한마디는 길게 뽑히는 참기름 향을 타고 식탁 위로 타령 소리처럼 번졌다.  나의 단골 식당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 사장님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더는 솥을 잡을 수 없다는 소식은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막막하게 찾아왔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음식은 많지만, 그 시절 참기름 한 방울에 담겨 있던 지독한 진심을 파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칠천 원으로 내가 샀던 것은 한 끼의 물리적 배부름이 아니라,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이었음을 셔터의 먼지를 보며 깨닫는다.

#오늘도 나는 낯선 식당가를 헤매며 주인을 잃은 밥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사장님이 마지막까지 얹어주신 계란 프라이의 노란 온기는 내 혈관 어딘가에 녹아들어, 차가운 도시의 오후를 견디게 할 결연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내어준 뜨거운 응원. 그 미련하고도 숭고한 유산은 내가 다시 길을 잃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고소한 향을 피워 올리며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밥상을 먹고 자란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니까.
 
 
끊어지는 사회 , 이어지는 사회

신문의 사회면을 펼친다. "사람을 끊습니다." 날카로운 활자가 가슴을 찌른다.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30대, 타인이 공포가 된 50대의 이야기가 흑백 사진처럼 건조하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가 버겁다. 코로나가 남긴 '거리두기'는 방역의 수단이 아니라 마음의 습관이 됐다. 전문가들은 이를 '주변인 거리두기'라 부른다. 세련된 용어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외로움의 냄새가 난다.

세상은 그렇게 차가워지는데, 내가 머무는 온수동은 시계가 거꾸로 흐른다. 매주 목요일 점심. 약속이라도 한 듯 10여 명의 사내들이 모인다. 지독했던 코로나 시절에도 우리는 이 시간을 거르지 않았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건 혼자 먹는 밥이었기 때문이다.

점심 한 그릇 비우고 커피 잔을 부딪친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당구장으로 향한다. 초록색 테이블 위에서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여섯 시가 넘으면 배가 출출해진다. 다시 단골 식당에 앉아 요기를 채운다. 누군가는 집으로 가고, 누군가는 다시 당구 큐를 잡는다. 예전에는 자정이 넘도록 그 짓을 했다.

요즘 세상은 SNS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화면 속의 글자는 화려하지만, 등 뒤로 밀려오는 외로움은 더 깊고 짙다. 디지털의 그림자다. 하지만 우리 온수동 친구들은 아날로그를 산다. 만나서 살을 부딪치고, 침 튀기며 웃고,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우리는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인생의 황혼이라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시끌벅적한 정오다.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딱 하나. 앞으로 10년만 더, 이토록 재미있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 웃으며 보내는 것이다.

사람을 끊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잇는다. 그것이 우리가 내일을 기대하는 유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