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화 컬럼

2025년 11월 ~ 2026년 9월
 
# 낭만 닥터

어제 병원 근처 식당에서 친구들 30명과 팔순 자축연을 가졌다.

며칠 전 한 친구가 플래카드에 뭐라고 쓸지 물어왔다. 박사라는 호칭은 빼고 그냥 우리 친구 劉能和의 팔순을 축하한다고만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전화가 다시 왔다. 이름 앞에 〈낭만닥터〉를 넣고 싶다는 거였다. 친구들이 보기엔 내 이름과 낭만이라는 단어가 제법 어울리는 모양이다.

의사 면허를 딴 해가 1974년이다. 그해 결혼도 했고, 인턴도 시작했다. 한 해에 세 가지 시작이 겹쳤으니, 유난히 인연이 깊은 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의사 생활이다. 직업치고는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처음엔 별다른 고민 없이 의사이신 아버님의 뒤를 잇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 길이었다. 함께 출발했던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현역에서 물러났다. 몇몇 의사 친구만이 아직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단순한 생각이 꽤 잘한 선택이었다.

낭만닥터. 곱씹을수록 푸근하고 넉넉한 이미지다. 나를 그렇게 봐준 친구들이 고맙다.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본 이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더 그렇다.

이왕 이 이름을 받았으니, 이름값을 하고 싶다는 다짐이 생긴다. 좀 더 넉넉하고, 좀 더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팔순이라는 숫자보다,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가 더 중요한 나이인 것 같다.

 
팔순

팔순 무렵이면 사람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이제는 쉬셔야지요.”
“무리하지 마세요.”
“건강만 챙기세요.”

말은 고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 억울하다.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사람이 이제 와서 겨우 “쉬는 일”만 하라고 하면, 그건 팔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팔순은 인생의 폐점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 묵은 술이 제맛을 내기 시작하는 때다.

젊을 때는 앞만 보고 달렸다. 돈 벌어야지, 자식 키워야지, 집안 세워야지, 사람 만나야지, 세상 눈치 봐야지, 하루가 전쟁이었다. 그때는 내가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인생이 나를 몰고 간 것 같았다.

그런데 팔순이 가까워지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환해진다. 이제야 세상이 보인다. 사람도 보이고, 돈도 보이고, 욕심도 보이고, 무엇보다 내가 보인다.

예전에 『메밀꽃 필 무렵』에는 달밤에 봉평장을 지나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피어 있는 장면이 나온다. 젊은 날 읽을 때는 그저 문장이 곱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다시 생각해보니, 그 장면은 꽃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이야기다.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꽃은 피어 있다. 젊은 사람에게만 꽃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늦은 밤에도, 먼 길에도, 늙은 장돌뱅이의 발밑에도 메밀꽃은 환하게 핀다.

그러니 팔순이 될 무렵에도 꽃은 핀다. 다만 꽃의 모양이 달라졌을 뿐이다. 젊은 날의 꽃이 사랑과 야망이었다면, 팔순의 꽃은 감사와 여유다. 젊은 날의 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꽃이었다면, 팔순의 꽃은 내가 조용히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꽃이다.

하지만 감사만 하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팔순의 인생에도 할 일이 있다. 먼저 몸을 움직여야 한다. 집 안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고, 경로당에서 장기 두고 화투 치며 세월을 보내기에는 아직 다리가 아깝고, 머리가 아깝고, 세월이 아깝다.

파크골프채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가도 좋고, 테니스 라켓을 잡아도 좋고, 걷기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인다. 마음이 움직이면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다.

팔순이 무서운 까닭은 나이 때문이 아니다. 멈추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사람은 멈추는 순간 늙는다. 달력의 나이가 아니라 생각의 나이가 문제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 정말 끝난다.

그러나 “아직 하나 더 배워보자, 하나 더 가르쳐보자, 하루 더 걸어보자”고 말하면 팔순도 청춘의 다른 이름이 된다.

팔순에는 또 할 말이 많다. 그런데 잔소리로 하면 안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잔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는 듣는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면 귀를 닫지만,
“내가 살아보니 이런 건 조심하더라” 하고 말하면 마음을 연다.

그러니 팔순의 어른은 목소리를 낮추고 깊이를 높여야 한다. 많이 산 사람의 말은 길 필요가 없다. 한마디가 묵직하면 된다.

또 팔순에는 화를 줄여야 한다. 젊을 때 화를 낸 것은 세상과 싸우느라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팔순에도 매일 화를 내면 그것은 세상 탓이 아니라 습관 탓이다.

이제는 얼굴에 웃음이 있어야 한다. 어른이 웃으면 집안이 편해지고, 마을이 편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다가온다. 팔순의 가장 큰 권위는 호통이 아니라 넉넉함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팔순쯤 되면 돈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 돈은 없으면 불편하지만,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는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면, 팔순에는 돈을 잘 쓰기 위해 살아야 한다.

밥 한 끼 사주고, 후배에게 책 한 권 사주고, 좋은 일에 조금 보태고, 손자에게 용돈 주면서 웃는 일도 인생의 큰 재미다. 움켜쥐기만 한 돈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잘 흘려보낸 돈은 사람의 마음에 남는다.

팔순 무렵에는 친구도 다시 귀해진다. 젊을 때는 친구가 많아야 좋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진짜 친구 몇 사람이면 충분하다.

만나서 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밥 먹었나?” “요즘 다리는 괜찮나?” 이런 말 한마디면 된다.
팔순의 우정은 거창하지 않아서 좋다.
살아 있다는 확인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순에는 감사해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기적이다.
넘어질 고비도 있었고,
속을 끓인 일도 있었고,
억울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 지나왔다.

지나오고 보니 원망할 일도 있었지만 배울 일도 있었다. 미운 사람도 있었지만 나를 단련시킨 사람도 있었다. 실패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사람이 깊어졌다.

돌아보면 감사뿐이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고 팔순을 조용히 정리하는 나이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팔순은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나이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펴고, 오늘 만날 사람에게 웃어주고, 젊은 사람에게 좋은 말 한마디 해주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나라 걱정도 하고, 마을 일에도 마음을 보태야 한다. 늙었다고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 한가운데 서야 한다.

나는 팔순 무렵 이렇게 살고 싶다.

늙었다고 숨지 않고, 나이 들었다고 주저앉지 않고, 남은 세월을 아끼지 않고 쓰고 싶다. 몸은 조금 느려져도 생각은 앞으로 가고, 머리는 희어져도 마음은
푸르게 살고 싶다.

젊은이들과 다투기보다 그들의 등을 밀어주고,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보다 꿈을 심어주고, 같은 노년들에게는 “우리 아직 끝난 것 아니다” 하고 말해주고 싶다.

메밀꽃은 달밤에 더 환하게 보인다. 인생도 그렇다.
젊은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팔순의 저녁빛 속에서 더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이 소중한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니 팔순 무렵,
나는 조용히 말하고 싶다.
인생은 아직 장이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길은 있고,
달빛은 있고, 메밀꽃은 핀다. 그리고 나는 아직 걸어갈 수 있다.

“팔순은 인생의 폐점 시간이 아니라, 오래 묵은 술이 제맛을 내기 시작하는 때다.”

오늘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생산하는 낭만

개그맨 고명환의 이야기 중 유독 마음에 걸린 말이 있었다.
삶의 목적을 소비와 즐거움에 두지 않고, 세상과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생산에 둘 때 진짜 보람과 낭만이 찾아온다는 말. 그 말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낭만이라고 하면 늘 여유롭게 누리는 것인 줄 알았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 맑은 날 햇살 아래 걷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백. 그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명환이 말하는 낭만은 반대였다. 내 이익을 넘어 타인을 향해 헌신하는 마음. 그 단계에서 일할 때 물질적 성공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 받는 것이 아니라 건네는 것. 그 방향에 낭만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생산이란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 남에게 건네는 일이다.
진료도 그렇다. 처방전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건네는 것이다. 글도 그렇다.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것이다. 이 순간의 마음도 그렇다. 나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만 쓰면 금세 바닥난다. 뇌가 적응하기 때문이다. 자극이 습관이 되면 자극이 아닌 것이 된다. 더 강한 것이 필요해진다. 그 사이클이 지치게 만든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면 다르다. 오히려 채워진다. 주는 것이 채워지는 것이다. 이 역설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경험이 쌓일수록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낭만은 여유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건네는 그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몸은 지쳐도 마음에 남는 그 따뜻한 잔향. 그것이 낭만이었다.
나를 넘어 세상을 향할 때, 창조의 기쁨과 홍익의 마음이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살 때 삶은 가장 오래 향기롭다고 생각한다.
 
#개즐소충


'개즐소충', 의사이자 작가인 이영하 선생이 만든 말이다. 암에 걸린 개가 매일을 즐겁게 보낸다는 책을 일고나서 더 좋아졌다.
카르페디엠보다 이 말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개처럼 즐겁게, 소처럼 충실하게. 순간의 기쁨에 솔직한 개의 감각과,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소의 걸음이 만났을 때, 삶은 가장 좋은 리듬을 찾는다.
개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내일을 조바심 내지 않는다. 눈앞의 산책과 바람 한 줄기에 온몸으로 환호할 뿐이다. 소는 그날의 기분이나 날씨에 좌우되지 않고 매일 정직하게 걸음을 옮긴다. 이 둘이 함께일 때 인생은 지치지 않고 오래간다. 즐거움만으로는 성과가 흐릿해지고, 충실함만으로는 쉽게 소진되지만, 개의 연료와 소의 방향타가 만나면 먼 길도 거뜬히 완주할 수 있다. 어느 한쪽만 붙들면 결국 절름발이 걸음이 된다는 걸, 두 태도를 함께 지닌 존재들만이 증명한다.
시련 앞에서도 이 태도는 유효하다. 개는 털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달리고, 소는 비바람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킨다. 실패에 과도하게 자책하지 않고 다시 정직한 걸음을 내딛는 힘, 그리고 타인을 판단하기보다 존재 자체로 반갑게 맞는 부드러움도 결국 이 둘에게서 배운다.
예전의 나는 진료실에서 소의 태도만 붙들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같은 성실함으로 환자를 보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료가 반복되는 노동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실함에 즐거움이 빠지니 걸음은 정직했지만 무거웠다. 그 뒤로는 하루 진료 중에도 작은 순간에 개처럼 반응하는 연습을 한다. 환자와 나누는 짧은 농담,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을 때의 순수한 반가움 같은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소의 걸음에 개의 웃음이 더해지고 나서야, 진료실이 다시 가벼워졌다.
단기의 소란스러운 소음에는 개처럼 무심히 반응하고, 정작 크고 중요한 시간 앞에서는 소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 이 배짱이 인생이라는 긴 주기를 여유롭게 건너게 해준다.
신나는 오늘이 모여 하루를 채우고, 묵묵한 걸음이 쌓여 내일을 만든다. 오늘도 개처럼 경쾌하게 웃고 소처럼 정성껏 충실하게 보낸다. 소박한 충실함 속에서 활력 있는 삶은 그렇게 완성된다.
 
#애시 다이크스

최근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 탐험가를 알게 됐다. 1990년생, 영국의 모험가 애시 다이크스(Ash Dykes). 인간의 한계를 횡단하며 다섯 개의 세계 최초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2014년, 스물세 살의 그는 120kg짜리 수레를 홀로 끌고 몽골의 알타이산맥과 고비사막 2,400km를 78일 동안 지원 없이 걸어서 횡단했다. 이듬해에는 마다가스카르의 여덟 개 최고봉을 모두 거치며 2,600km를 종단하다 말라리아로 사경을 헤맸지만 끝내 완주했다. 2018년부터는 아시아 최장 하천인 양쯔강 6,400km를 발원지부터 발해만까지 352일간 걸어서 완주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됐다. 2024년에는 수리남 최고봉 율리아나탑을 최단 시간에 오른 뒤 코페나메 강을 카누로 완주해 기네스 기록 두 개를 더 보탰다. 말라리아에서 살아난 경험으로 지금은 'Malaria No More UK'의 특별 대사로도 활동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나는 유난히 열심히 본다. 걷는 게 좀 불편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막과 산맥을 며칠씩 걸어 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진료실과 집을 오가는 짧은 걸음조차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를 보며 드는 감정은 부러움보다 동질감에 가깝다. 그가 넘은 건 사막과 산이지만, 내가 매일 넘는 건 불편한 몸으로도 오늘 할 일을 해내는 작은 고비들이다. 규모는 다르지만 매일 한 걸음씩 밀고 나가는 그 리듬만큼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한계로 밀어 넣으며 묵묵히 나아가는 그의 발자취는, 결국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몸이 완벽하게 움직여야만 전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한 걸음이 쌓이면, 그것도 결국 하나의 횡단이 된다. 배움은 몸의 조건과 무관하게 매일 갱신되는 법이니까.
# 암에 걸린 개

51세의 수의종양학 전문의 르네 알사라프(Renée Alsarraf)는 평생 암에 걸린 동물들을 치료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스스로 식도암 판정을 받는다. 그 경험을 담은 책 《아픈 동물의 시간(Sit Stay Heal)》은 치료자에서 환자로 자리를 옮긴 한 의사가 자신의 오랜 환자들이었던 동물들에게서 되레 삶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기록이다.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개나 고양이는 몸에 종양이 있어도 재발의 공포로 오늘을 낭비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맛있는 밥 한 그릇, 좋아하는 사람에게 달려가는 짧은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뿐이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자책도 없다. 주어진 오늘의 호흡과 움직임에 그저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보호자와 의사와의 연대가, 어떤 처방보다 깊은 치유로 작용한다. 알사라프가 오랫동안 동물들을 치료하면서도 정작 이 단순한 진실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못했다는 대목이 오래 남는다. 알고 있던 지식과 몸으로 겪어낸 깨달음 사이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의 표정에서, 병명보다 그날그날의 컨디션을 먼저 읽는 습관을 떠올렸다. 내일 검사 결과가 어떻든, 오늘 이 한 시간만큼은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이 책이 동물들에게서 발견한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예전의 나는 진료를 병명 중심으로 설계했다. 오늘의 컨디션보다 다음 검사 결과, 다음 수치가 먼저였다. 그런데 오랜 시간 환자들을 만나며 알게 됐다. 정작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건 미래의 수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라는 걸. 그 뒤로는 진료실에서 병명보다 먼저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를 묻는 습관이 생겼다. 알사라프가 아픈 동물들에게서 배운 것을, 나는 매일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환자들에게서 배우는 셈이다.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다만 동물은 그 불확실성 앞에서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본능으로 안다. 몸이 약해져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온기를 느끼는 힘만큼은 끝까지 마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픈 동물들은 말없이 보여준다.

삶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견디는 법이 아니라 마주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결국 활력있는 삶(flourishing life)의 시작이다.
 
손녀의 망토

뉴욕에 사는 高1 손녀 Ari(아리)에게서 소식이 왔다.
자기 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다는 것이다. 제목이 《How Ari Got Her Cape》. 아리는 어떻게 망토를 갖게 되었나. 처음엔 동화책인가 했다. 알고 보니 아리 자신의 이야기였다. 열여섯 소녀가 자기 삶을 책으로 썼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이미 무언가가 가슴을 건드렸다.
어느 날 아침 아리는 베개에 머리카락이 잔뜩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원형 탈모증 진단.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할아버지로서 마음이 철렁했다. 20년 넘게 진료실에서 질환 앞에 무너지는 마음을 숱하게 봐온 나였다. 특히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은 그 나이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거다. 거울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을 거다.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의사인 나는 알고, 할아버지인 나는 더 아프게 알았다.
그런데 아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가족과 친구들의 지지 속에서 아리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머리카락이 없는 자기 모습도 자신만의 특별한 슈퍼파워라는 것. 감추기 위한 가발이 아니라 자기표현의 도구로 핑크색 가발을 골랐다. 숨으려는 선택이 아니라 드러내려는 선택이었다. 우울해지기 쉬운 상황을 스스로 톡톡 튀는 에너지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렇게 아리는 자기만의 망토(cape)를 얻었다.슈퍼히어로의 망토는 힘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생기는 것이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만의 정체성이 되는 순간. 아리는 그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20년 넘게 진료실에서 병을 없애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손녀를 통해 다른 것을 배웠다. 병을 없애는 것과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아리는 탈모를 없애지 않았다. 탈모를 넘어서는 법을 스스로 찾아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짜 치유라는 걸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가르쳐준 셈이다. 같은 진단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그 병이 삶이 되고 어떤 사람은 그 병을 지나 더 강해진다. 병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태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 책이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아리와 같은 진단을 받고 거울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아리의 책을 만나면 다른 것을 본다. 나와 같은 일이 생겼는데 핑크색 가발을 고른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아픔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니라 존재로 하는 위로다.
자기 아픔을 창조의 재료로 바꾸고 그 창조물이 다시 다른 이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 이보다 더 값진 순환이 있을까.
손녀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손녀가 할아버지를 가르쳤다.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단단해진다. 손녀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기쁨과 손녀에게 배우는 감사가 함께 온다.아리는 망토를 얻었다. 자기 자신으로 살게 해주는 망토를. 그 망토를 열여섯에 얻었다.아리야, 고맙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네 망토가 오래오래 펄럭이기를~~
 
#소박한 사치

이번 달에 책을 다섯 권 샀다. 사진집 한 권, 파인만의 물리학 입문서 한 권,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세 권.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목록을 적어놓고 보니 웃음이 난다. 나의 유일한 사치가 이것이다.

젊은 시절엔 사치라 하면 다른 것들을 떠올렸다. 좋은 차, 좋은 시계, 남들이 알아주는 무언가. 그런 것들을 갖추는 게 성공의 증거라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yes24 인터넷서점에서 책 몇 권 골라 장바구니에 올려놓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큰 사치다. 무엇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무엇에 마음이 설레는지가 사치의 기준으로 바뀐 셈이다.

특히 요즘은 히가시노 게이고에 푹 빠져 있다. 평생 의학 서적과 인문서, 신앙 서적을 주로 읽어왔는데, 추리소설이라는 낯선 장르에 발을 들이고 보니 새로운 재미가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그 긴장감, 마지막 반전 앞에서 무릎을 치는 순간. 이 나이에 이런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젊을 때는 독서도 늘 목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실력을 쌓기 위해 읽었다. 지금은 그냥 재미있어서 읽는다. 목적 없는 읽기의 즐거움을 이제야 알아가는 중이다.

사진집도 한 권 골랐다. 아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이미지와 구도에 눈이 간다. 글로만 채워진 책장 사이에 사진집 한 권이 끼어 있으니 서재의 결도 조금 달라진다.

그리고 파인만의 물리학 입문서 한 권. 젊을 때 의학 공부에만 매달리느라 물리학은 늘 뒷전이었다. 이제 와서 파인만의 문장을 따라가며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다시 배운다. 환자의 몸을 들여다보는 눈과 우주의 원리를 들여다보는 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결국은 궁금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섯 권의 책값이 10만 원이 채 안 된다. 그런데도 이걸 사치라 부르는 이유는, 이만큼이면 충분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갖지 않아도, 더 크게 쓰지 않아도 마음이 넉넉하다. 소박한 취미 하나를 붙들고 살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나이 들어가며 얻은 복이다. 젊어서는 몰랐던 것을, 지금은 안다.

책상 위에 쌓인 다섯 권을 보며 생각한다. 소박풍요란 이런 것이다. 크지 않아도 충분한 것,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이 채워지는 것. 그리고 이 나이에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에 설렐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행복이다.

 
**내와 나**

오랫동안 "내 생각"이라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써왔다. 내 생각이 옳다, 내 판단이 맞다, 내 감정이 이렇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내"라는 글자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내"는 "나의"의 준말이다. 영어로 치면 my. 소유격이다. 내 생각은 결국 "나의 생각"이지 "나" 자체가 아니었다. 이 단순한 문법적 사실을 왜 평생 놓치고 살았을까.

예전에는 누군가와 의견이 부딪히면 그게 곧 나 자신이 부정당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내 판단이 틀렸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했다. 내 생각과 나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에고가 곧 나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중에 유난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친구가 있다. 대화 중에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끝까지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다. 그 친구 주변은 늘 시끄럽다. 불화가 많다.작은 의견 차이도 그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전선이 된다. 예전 같으면 나도 거기 맞서 언성을 높였을 거다. 그런데 요즘은 그 모습을 보며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유난히 강한 친구구나. 에고가 세게 작동하고 있구나. 그 뒤에 숨은 건 아마 인정받고 싶은 결핍이겠구나. 그렇게 보고 나면 화가 나기보다 연민이 앞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진료실에서도 비슷한 걸 배운다. 환자의 증상을 들을 때, "내가 아프다"는 말과 "몸에 통증이 있다"는 말은 결이 다르다. 통증은 몸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지 그 사람 전체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증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며 더 크게 앓는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화가 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해서 내가 곧 그 화는 아니다. 생각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이고, "나"는 그 현상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다.

에고, 즉 "내"는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자아일 뿐이다. 늘 비교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고, 인정을 갈구한다. 반면 진짜 "나"는 그런 생각과 판단이 일어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주체다. 생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 생각과 다른 존재라는 증거다.

이 구분 하나를 알고 나니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누군가 옳고 그름에 유난히 집착할 때, 예전처럼 맞서지 않고 그 사람의 "내"가 지금 목소리를 높이고 있구나 하고 한 걸음 물러나 본다. 나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화나 조급함이 올라올 때, 이건 "내" 반응이지 "나"는 아니라고 되뇌면 신기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와 나가 다르다는 걸 아는 것. 이것 하나로 인생살이가 훨씬 헐거워진다는 걸, 요즘 매일 확인하고 있다.재미있는 세상이다.

 
비바 할머님

인연을 맺은 지 22년 된 여자 환자분이 있다. 올해 여든 여섯이시다. 남편되시는분은 아흔. 할아버지는 작년 가을 척추협착증 수술을 받았는데 경과가 좋지 않아, 요즘은 활동할 때마다 보호자가 곁에서 거들어야 한다. 지난 연말엔 4등급 판정까지 받으셨다. 내가 조금 빨리 등급을받게끔 도움을 드렸다.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실 때마다 지팡이 소리가 먼저 들리곤했다. 걸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그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진료실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할머님이 남편을 케어하느라고 너무 힘이 들어서 돈도 벌겸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셨다는 것이다. 정작 당신 몸도 성치 않은데 남편 병수발까지 감당하다 보니, 차라리 그 일을 배워서 제대로 돌보자는 마음이었다고 하셨다. 힘들다는 말 뒤에 숨은 그 실용적인 결단이 오히려 더 마음에 남았다. 86세,
학원 개원 이래 최고령 수강생이었다고 했다. 400시간 가까운 수업과 실습을 마스터하고, 일주일 전 시험에 합격했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젊은 수강생들 틈에서 필기를 하고 실습을 따라가느라 진땀을 뺐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표정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시험 전날엔 잠도 설쳤다고 하셨다.
시험성적은 69점. 당당히 패스. 스스로도 대견하시다고 한다. 몇 번 시험 볼 각오를 했는데, 단번에 패스라니…. 점수를 말씀하시는 목소리에는 부끄러움보다 뿌듯함이 앞섰다. 합격선을 겨우 넘긴 점수라도 당신에게는 만점이나 다름없었다.
일은 하루 90분, 출석 체크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매달 90만 원을 받으신다. 몸도 챙기고 돈도 버니 이만한 게 없다며 웃으셨다. 큰돈이 아니어도 스스로 벌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훨씬 더 큰 의미였다. 자식들 용돈에 기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가 자존감을 지켜주는 힘이었다.
당신 몸조차 남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자격을 새로 얻어내신 것이다. 진료실에서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 분은 처음 뵈었다. 나이도, 몸 상태도, 남편 병수발이라는 무게조차 핑계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무게를 새로운 배움으로 바꿔내신 셈이다. 진료를 마치고 다음 환자를 준비하는 짧은 틈에도 그분의 웃음이 자꾸 떠올랐다. 의사로서 이십여 년 수많은 환자를 만났지만, 몸이 불편한 처지에서 오히려 새로운 자격을 얻어내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그 열정 앞에서 오히려 내가 배우는 기분이었다.
비바 할머님. 그 이름이 딱 어울린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몸소 증명해 보이신 셈이다. 힘들다고 주저앉는 대신 배움으로 답을 찾으신 그 자세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더위를 피하느라고 잔머리만 굴리는 나늘 몹시 부끄럽게 만든 할머님을 통해 또 한수 배운다.
 
福

얼마 전 신문에 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곱 식구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천안시에 사는 김기연, 고경민 부부였다.
아내 김씨는 남편을 만나기 전엔 결혼도,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두 달 후면 여섯째가 태어난다고 한다. 외벌이로 다섯 아이를 키우는 정성이 대단했다. 낳아보면 그 안에서 얻는 행복이 엄청나다는 말, 그 소박한 고백이 참 보기 좋았다.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이 저마다 달랐다. 막내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고, 큰아이는 동생들을 감싸안듯 서 있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가족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여섯 아이를 키운다는 건 계산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넉넉해서 낳은 게 아니라 낳고 보니 넉넉해진 것이었다.
더 마음에 남은 건 그다음이었다. 자기네 가족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복(福)이라고 했다. 여섯 아이는 삶의 축복이자 큰 복이라는 뜻이었다. 계산하지 않고 내어준 시간, 밤잠을 줄이며 채운 손길, 그 모든 것이 쌓여 복이라는 한 글자로 응축된 셈이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세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글자에 다 담을 수 없는 날들을 굳이 한 글자로 눌러 담은 것, 그것 자체가 이미 넉넉한 마음이었다.
문득 나도 우리 가족을 한 단어로 표현해본다. 기쁨(Joy)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함께한 지 벌써 51년, 두 아이는 삶의 기쁨이자 큰 복이었다. 진료실에서 하루종일 환자를 마주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가 그려놓은 그림 한 점이 식탁 위에 놓여 있곤 했다. 말없이 건네는 그 색채 속에서 오늘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풀리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자라며 겪었던 크고 작은 부침도 지나고 보니 모두 기쁨의 다른 얼굴이었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서운함이 아니라 오히려 담담한 안도였다. 저마다 제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했다. 그 세월을 돌아보면 늘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먜주 목요일마다 친구들과 같이하는 시간도 기쁨의 한 축이다. 요새는 8순잔치를 빙자해서 더 많이 먹고 더 웃는다. 얼마전에는 제주살이하는 친구가 올라오서 같이 축하를 해주었다. 아들 녀석은 신나게 카드결제하고,,,,,
누군가에겐 복, 누군가에겐 기쁨.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삶의 가장 큰 복이라는 사실. 복이든 기쁨이든, 그것은 결국 곁을 지켜준 이들과 함께 쌓아온 감사행복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름은 저마다 달라도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 그것이 곧 복이고 기쁨이다.
 
# 할수 있다니

같은 국밥을 먹어도 어느 날은 그냥 밥이고, 어느 날은 눈물 나게 맛있다. 차이는 국밥에 있지 않다. 마음속 언어 하나가 그 차이를 만든다. "이 음식이 맛있다"가 아니라 "내가 오늘 이걸 씹고, 맛보고, 삼킬 수 있다니." 문장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감각의 모든 세포가 깨어난다.
예전의 나는 밥을 그냥 밥으로 먹었다. 맛있으면 맛있다, 없으면 없다, 그게 전부였다. 씹고 삼키는 그 당연한 동작에 감탄을 붙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장 하나를 바꿔본 것뿐인데, 똑같은 국밥 한 그릇이 완전히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대상이 아니라 존재로 시선이 옮겨가는 순간이다. 맛의 크기를 재던 눈이, 이걸 느낄 수 있는 나 자신의 기적을 보는 눈으로 바뀐다. 그러니 감정이 몇 배로 증폭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진짜 연금술은 돌을 금으로 바꾸는 게 아니다. 무심코 지나치던 평범한 하루를 눈부신 하루로 바꾸는 일이다. 매일 뜨는 아침, 무심히 들이쉬는 공기, 스쳐 지나가는 음악 한 소절. 그것들은 당연히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오늘도 허락된 선물이다. 조건으로 보면 무감각해지고, 선물로 보면 다시 눈이 뜨인다.
"~해야 하는데"라는 말버릇 속에는 늘 결핍이 산다. 반면 "~할 수 있다니"라는 말버릇 속에는 이미 가득 찬 풍요가 있다. 같은 하루를 살면서도 어떤 말을 붙이느냐에 따라 결핍의 하루가 되기도 하고 풍요의 하루가 되기도 한다. 감사란 결국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시선이지, 없는 것을 채우는 노력이 아니다.
진료실에서도 이 말버릇 하나가 하루의 결을 바꿔놓는다는 걸 알게 됐다. 환자를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와, 오늘도 누군가를 살필 수 있다니 하는 마음으로 시작할 때는 같은 진료실인데도 공기가 다르다. 전자는 어깨가 무겁고, 후자는 걸음이 가볍다. 결국 바뀐 건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시선 안에서는 삶의 작은 파도조차 밋밋하게 지나가지 않는다. 걷을 수 있다니, 들을 수 있다니, 웃을 수 있다니. 당연했던 동사 하나하나가 감탄이 되는 순간, 사는 맛이 살아난다. 풍요로운 삶은 더 특별한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주어진 하루를 "~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으로 마주하는 시선 안에 있다.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만드는 건 결국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그 하루를 바라보는 눈 하나다.
.오늘 여러분의 점심은 확실히 더 맛이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 소박한 풍요

어제 모교회의 목사님 설교에 등장한 이름. 제프리 홀터.
그는 미국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 힌스데일에 살았던 노인이다. 이동식 주택단지의 관리인이자 잡역부. 자동차도, TV도, 컴퓨터도 없었다. 낡은 옷을 입고 잔디 깎는 기계를 모터사이클처럼 몰고 다녔다. 누가 봐도 가난한 노인이었다.

2023년, 82세로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재산은 380만 달러, 우리 돈으로 50억 원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펀드와 주식에 투자해 모은 돈이었다. 가족이 없던 그는 그 전부를 평생 살아온 마을에 남겼다. 교육과 보건, 문화와 복지를 위해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이 이야기를 듣고 오래 마음에 남았다. 화려한 소비 대신 꾸준한 축적을 택한 삶. 나 역시 투자를 대할 때 늘 같은 태도를 지키려 한다. 시세를 좇아 들뜨지 않고, 장기적 확신 위에서 묵묵히 쌓아가는 것. 홀트의 낡은 옷과 잔디깎이는 그가 무엇을 좇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남에게 보이는 부가 아니라, 스스로 확신한 방향을 오래 지켰다.

더 놀라운 건 그 축적의 끝이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평생 검소하게 살아 모은 돈을, 결국 자신이 살아온 마을 전체에 돌려주었다. 소박하게 살았던 이유가 그제야 선명해졌다. 그는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 멀리 보고 나누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가난해 보였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풍요로웠다는 말이 그래서 와닿는다. 소박함과 풍요는 반대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박함이 진짜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 풍요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을 전체를 위해 쓰일 때, 가장 오래 남는 빛이 되었다.


 
Kick back and relax!!

동네 아파트를 오가다 보면 늘 마주치는 얼굴이 있다. 쿠팡 배송기사, 안경을 쓴 오십대 남자다. 언제 보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오르내린다. 무거운 박스를 양손 가득 들고도 걸음은 빠르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구나, 지나칠 때마다 생각만 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전, 그의 셔츠 뒷면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Kick back and relax." 다리 뻗고 푹 쉬라는 말이다. 땀에 젖은 등판에 새겨진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몸에 새겨진 문장이 다름 아닌 '쉬어라'라는 말이라니.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진짜 쉼을 안다는 사실을, 그 셔츠 한 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쉬는 것도 아무나 잘 쉬는 게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난 뒤에 맞는 휴식이라야 그 참맛을 안다. 예전에 산을 자주 오르던 시절이 떠올랐다. 땀을 흠뻑 흘리고 정상 근처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잔 들이켤 때의 그 기쁨,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제는 등산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무릎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이제 그런 산행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 쿠팡맨을 보며 나는 잠시 그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오늘 하루도 저렇게 땀 흘리며 뛰어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마침내 셔츠에 적힌 그대로 다리 뻗고 푹 쉬겠지. 그 순간이 그에게는 하루 중 가장 달콤한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산에 오를 수 없는 나는, 그 대신 다른 방식으로 kick back and relax를 꿈꾸어본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 딥 베이스 재즈曲을 들으며 안마의자에 몸을 묻는 시간,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그 산 위의 막걸리 한 잔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땀 흘려 일한 사람만이 쉼의 깊이를 안다. 무엇을 하든 다 판단할 필요 없이, 그저 오늘 최선을 다한 것에 감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오늘 저녁엔 다리 뻗고 푹 쉬시길,,,,
 
노 프롸블럼

신문에서 인도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한참을 웃었다. 10여년 전 인도로 떠난 한 여행가는 그 나라가 무섭기만 했다고 한다. 무질서하고 시끄럽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쉼 없이 벌어지는 곳.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클랙슨 소리와 인파에 휩쓸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갈수록 정이 들어 벌써 다섯 번째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섭던 나라가 그리운 나라로 바뀌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단점도 많고 불편한 일투성이인 그 나라가 행복한 이유를, 기사는 "노 프롸블럼"이라는 말에서 찾는다. 주문한 계란 프라이 대신 삶은 계란을 반으로 잘라 내놓고도 식당 주인은 태연히 말한다. "노 프롸블럼. Taste is good." 억울할 법도 한 상황인데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다음날 음식에 바퀴벌레가 있어 항의해도 반응은 같다. 벌레를 툭 털어내며 "Now. 노 프롸블럼." 대수롭지 않다는 그 태도가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다. 인도 여행자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2주를 못 버티면 인도를 싫어하게 되고, 2주 이상 버티면 평생 사랑하게 된다고. 처음의 당혹감을 넘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문제가 문제 되지 않는 순간,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예전에는 사소한 수치 하나, 경미한 이상소견 하나에도 표정부터 굳었다. 환자보다 먼저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가능성 하나까지 짚어가며 무겁게 말을 얹곤 했다. 그런데 그 무거운 얼굴이 환자에게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을, 오랜 진료 끝에야 알았다. 표정을 읽는 건 환자가 먼저였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굳은 얼굴에서 불안을 눈치채곤 했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드는 건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얼굴이었다.
요즘은 다르다. 검사 결과를 설명할 때 "크게 걱정하실 일 아닙니다"라는 말을 먼저 건넨다. 물론 정말 살펴야 할 것은 놓치지 않는다. 다만 놓아도 될 걱정까지 끌어안고 무겁게 만들지는 않는다. 필요한 건 정확한 진단이지, 환자의 불안을 키우는 표정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환자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순간, 몸의 긴장도 함께 풀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어깨가 내려가고 숨소리가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일 때, 진료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였음을 다시 깨닫는다. 계란 프라이 대신 삶은 계란을 내놓고도 웃을 수 있는 그 여유가, 진료실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 사람들이 무질서 속에서도 행복한 건 문제를 없애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붙들지 않아서일 것이다. 우리는 반대로, 문제 되지 않을 일까지 문제 삼아 스스로를 시끄럽게 만들 때가 많다. 작은 실수 하나, 예상과 다른 결과 하나에도 마음속에서 오래 붙들고 놓지 못한다.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나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대개 감사할 일들뿐이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행복이 따라온다.
"노 프롸블럼"을 생활 속에 들이면, 조금은 더 살맛나는 오늘이 될 것 같다.
 
일요일 사진 이야기


지난 일요일 아침, 아내가 식사 전 잠깐 산책하고 온다더니 사진 몇 장을 들고 돌아왔다. 물 위에 떠 있는 하루살이, 물속에 비친 대나무와 나뭇잎, 그 미세한 결들을 클로즈업으로 담아온 사진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보여주는데, 나는 처음엔 뭘 찍은 건지 한참을 들여다봐야 했다. 익숙한 산책로의 한 귀퉁이가 이렇게 낯설게 보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풍경사진을 좋아한다. 넓게 트인 하늘, 산 능선, 강 전체를 한 프레임에 담는 걸 즐긴다. 그런데 아내의 사진은 다르다. 작은 대상을 크게 끌어당긴다. 물 위에 앉은 하루살이 한 마리, 잎맥 하나하나의 그림자, 대나무 줄기가 물에 비쳐 만드는 선의 교차. 나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 아내의 눈을 통과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같은 길을 걸어도 나는 저 멀리 산자락의 능선을 눈에 담고, 아내는 발밑 물웅덩이 하나에 시선을 멈춘다. 넓게 보는 눈과 깊게 보는 눈, 그 차이를 이렇게 사진 몇 장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에는 산책이라 하면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멀리 갔는지가 중요했다. 걸음 수를 세고 거리를 확인하는 게 산책의 성과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사진을 보고 나서는 걸음의 속도보다 걸음 사이사이 무엇을 보았는가가 더 궁금해졌다. 평범한 물웅덩이 하나가 비범한 하루로 바뀌는 순간을 사진 한 장이 보여준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디테일에 눈이 간다. 요즘은 나도 걷다가 가끔 멈춰 선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나뭇잎 하나, 돌멩이 하나를 괜히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림을 오래 그려온 사람의 눈은 역시 다르다. 색의 농담, 선의 방향, 반사되는 빛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 나보다 미적 감각이 한 수 위라는 걸 이럴 때마다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 사진 덕분에 처음 알았다. 물 위에 앉아 있던 그 작은 점들이 하루살이라는 것을. 대나무와 수초가 물 위에서 만드는 그림 같은 반영은 덤으로 얻은 선물이었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하루살이의 가느다란 다리 여섯 개가 수면 위에 만든 작은 파동까지 보였다. 그 미세한 흔들림 하나가 물 전체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 사진들에는 무언가 다른 게 있다. 설명하기보다 그저 존재를 느끼게 하는 힘.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간, The presence. 아내는 그 순간을 붙잡아 왔고, 나는 그것을 글로 옮기며 뒤늦게 함께 그 자리에 서 본다. 사진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무 설명 없이도, 그 물웅덩이 앞에 나도 함께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언젠가 에세이집을 낸다면 아내의 사진과 그림을 함께 싣고 싶다. 글은 내가 쓰고 그림은 아내가 그리면, 그것대로 부부의 합작품이 되지 않을까.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아침을 바라본 두 개의 시선이 한 권의 책 안에서 만나는 것, 생각만 해도 좋다. 어쩌면 그 책의 첫 페이지는 지금 이 하루살이 사진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은 것에서 시작해 큰 이야기로 번져가는, 우리 부부의 방식 그대로.
작은 것을 크게 보는 눈 하나가 하루를 다르게 만든다. 하루살이 한 마리도 자세히 보면 이야기가 된다.
 
나의 개똥철학 3’그’

말버릇 하나가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입에 붙은 세 마디가 있다. “그렇구나, 그럴수있지, 그래 그래.” 누가 정리해준 이론도 아니고, 책에서 배운 것도 아니다. 그냥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굳어진, 말하자면 나만의 개똥철학이다. 대단한 이름을 붙일 것도 없이, 그저 입에서 먼저 나오고 나중에 마음이 따라가는 말들이다.
전에는 달랐다. 진료실에서든 일상에서든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서 먼저 판단이 섰다. 맞다, 틀리다, 이건 이래야 하는데.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습관이었다. 환자의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처방을 내리고 있었고, 친구의 넋두리를 들으면서도 어디가 잘못됐는지부터 짚었다. 그 판단은 종종 대화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상대는 방어하고, 나는 설득하려 하고, 결국 둘 다 지쳤다.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는 건 서먹함뿐인 날이 많았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서면 이겼다는 느낌보다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더 오래 남았다.
바뀐 건 별거 아닌 순간이었다. 누군가 하소연을 늘어놓는데, 반박할 말이 딱히 없어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넘긴 적이 있다. 딱히 계산해서 던진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상대의 표정이 풀렸다. 판단받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별다른 해결책도 내놓지 않았는데 상대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뒤로 의식적으로 써보기 시작했다. 그렇구나로 일단 받아들이고, 그럴수있지로 여지를 남기고, 그래 그래로 마무리한다. 세 마디를 거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시비를 가릴 마음이 사라진다. 마치 세 개의 문을 차례로 지나면서 판단이라는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 같다.
가장 먼저 편해진 건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판단을 내려놓으니 에너지가 덜 든다. 매번 옳고 그름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가볍다. 예전 같으면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을 언쟁 하나가, 이제는 "그럴 수 있지" 한마디에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그 가벼움 끝에는 항상 비슷한 생각이 따라온다. "저 사람 덕분에 또 하나 배우는구나"하니 마음이 편하다. 판단을 멈추면 덕분이라는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에서 감사가 자란다. 세 글자짜리 감탄사가 결국 무판단에서 덕분으로, 덕분에서 감사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준 셈이다.
거창한 철학은 아니다. 그저 ‘그렇구나, 그럴수있지, 그래 그래”. 그런데 이 개똥철학 하나로 하루가 훨씬 덜 피곤해졌다. 그리고 덜 피곤한 하루 끝에는, 어김없이 조금 더 넉넉해진 내가 서 있다.

 
친구 A


친구 A가 있다. 그의 큰 덕목은 뿌리가 깊다는 점이다. 나무를 보면 안다. 가지가 흔들려도 뿌리가 깊으면 쓰러지지 않는다. 친구 A가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 그에게 무례하게 굴 때가 있다. 그런데 그는 상대를 악인으로 보지 않는다. 연민을 가진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가. 그 질문을 먼저 던진다. 무례함이나 분노 뒤에 숨겨진 결핍과 상처를 들여다본다.
그 질문 하나가 분노를 이해로 바꾼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배울 점을 찾아 내면의 힘으로 삼는다. 상대를 적으로만 보면 싸움이 된다. 상대의 고통을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친구 A는 늘 다른 것을 본다.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이념이 다르다. 의견이 갈린다. 그런데 그는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그를 보며 알았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도 즉각 폭발시키지 않는다. 자극을 받은 순간과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사이에 그는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 공간 안에서 스스로 판단한다.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공간이 좁다. 자극이 오면 거의 즉시 반응이 나간다. 그런데 친구 A는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넓혀온 것 같다. 같은 자극을 받아도 그에게서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그를 보면 링컨 대통령이 떠오른다.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때 링컨을 가장 모질게 헐뜯었던 사람이었다. 링컨을 가리켜 멍청한 시골뜨기 고릴라라고 불렀다.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변호사 시절 함께 일할 때도 링컨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이 된 뒤 그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앉혔다. 전쟁부 장관. 남북전쟁이라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신을 가장 심하게 모욕했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를 내줬다. 주변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런 사람을 곁에 두냐고 물었다. 링컨은 말했다. 그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무례했던 과거가 아니라 나라에 필요한 능력을 봤다.
스탠턴은 나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참모가 됐다. 링컨이 암살당한 그날 밤, 그의 침상 곁에서 가장 슬프게 울었던 사람도 스탠턴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헐뜯었던 사람도 다른 면을 보면 그렇게 변했다. 링컨에게도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모욕을 받아도 즉시 적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능력과 진심을 끝까지 지켜봤다.
같은 친구인데 존경스럽다. 나이도 같고 살아온 시간도 비슷한데, 그 앞에 서면 무언가 다른 무게가 느껴진다. 그가 가진 의연함, 그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부럽다. 조금이나마 그것을 배우고 싶다. 자극이 와도 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 상대의 고통을 먼저 보는 것.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 친구 A를 보면서 그릇이 큰 사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가까이에, 매주 만나는 자리에 있다. 그저 내가 더 자세히 보지 못했을 뿐이다.

 
「판독(덕)감행」

판 — 판단을 멈추다
하루에도 수없이 저울질한다. 이것은 옳은가, 저것은 틀렸는가. 내 삶은 왜 이리 팍팍하고, 저 사람은 왜 저토록 여유로운가. 끊임없이 자르고 나누는 사이, 영혼이 지쳐간다.
뚝배기 콩나물국을 보며 왜 고기반찬이 아닐까 따지지 않는 것. 그 따스한 국물을 그냥 조용히 바라보는 것. 채점관 노릇을 그만두는 순간, 결핍의 안개가 걷힌다. 판단을 멈추면 세상이 비로소 맑은 얼굴을 드러낸다.
덕 — 덕분에를 만나다
판단이 사라진 자리에 뜻밖의 손님이 온다. '때문에'가 떠난 자리에 '덕분에'가 앉는다.
비가 오면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 덕분에. 바람이 불면 뺨을 스치는 시원함 덕분에. 고단한 시련마저 나를 더 단단하게 빚어준 덕분에. 모든 것을 덕분에로 바라볼 때, 거친 세상이 나를 돕는 아군으로 바뀐다.
감 — 감사가 흐르다
덕분에가 쌓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그것이 감사다.
좋은 일이 생겨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진짜 기적은 아무 일도 없는 고요한 아침에, 혹은 눈물겨운 고난의 한복판에서 먼저 감사를 쏘아 올릴 때 일어난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오늘 미리 감사할 때, 현실은 조용히 형태를 바꾼다.
행 — 행복으로 나아가다
감사가 온몸을 채울 때, 행복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
행복은 먼 미래에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삶을 온전히 맛보는 상태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꽃 하나에서 우주를 보고, 곁에 있는 사람의 빛을 먼저 발견하는 눈. 그 눈이 열릴 때, 인생은 가볍고 자유로운 흐름 위에 올라탄다.
판단하지 않고 바라본다. 모든 인연에 덕분에를 붙인다. 가슴 저린 감사를 먼저 보낸다. 그리하여 오늘을 온전히 즐기는 행복의 주인이 된다. <판덕감행>을 말하기 쉽게 <판독(덕)감행>으로 바꿔본다. X-레이 판독을 감행하는 기분으로.
<판독(덕) 감행>. 신나고 충실한 오늘 ,더 좋은 내일을 연다

 
# 적게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많이 가지면 행복해질 거라 믿었다. 더 큰 집, 더 높은 직위, 더 많은 인정. 그것들을 향해 달리는 동안 행복은 늘 다음 정거장에 있었다. 도착하면 또 다음 역이 보였다. 끝이 없는 그 트레드밀 위에서 나는 오래 달렸다.
그런데 어느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났다.

"사람은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적게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문장을 뒤집어 읽으니 다른 세상이 보였다.
중국 온라인 커뮤니티 톈야에서 흥미로운 설문이 있었다.
"당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다시 태어나겠습니까?"
응답자의 98퍼센트가 아니라고 답했다. 처음 이 숫자를 봤을 때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 그런데 그들이 모두 가난하거나 불행한 환경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결과는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욕심은 스트레스를 부르고, 스트레스는 다양한 심리적 갈등을 유발한다. 이 패턴이 반복되면 평생 고달픈 인생을 탄식하는 비관적 염세주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해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뺄셈 인생.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너무 바쁘게 살지 말고, 너무 피곤해지지 말자. 계속 뺄셈을 하다 보면,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음을 깨닫게 된다.

더하는 인생이 아니라 빼는 인생. 생각의 가지를 치고, 욕심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었다.
세상은 원래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다. 그것을 복잡하고 다채롭다고 말하는 순간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단순하다고 해서 조악하거나 허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출발점이자 인생의 정수다. 그리고 그 단순함의 진리는 물질보다는 정신에서, 육체보다는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생명은 신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과한 욕심으로 시작되는 험난한 길을 가지 말고, 즐기는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인생을 가시밭길로 만들지 꽃길로 만들지는, 욕망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더 가지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묻는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 생각인가, 아니면 덜어내도 좋은 무게인가. 적게 생각할수록 더 가벼워진다. 오래 걸을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적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한 문장이 오늘 내 하루를 가볍게 한다.

 
# 모지스 할머니

나는 늦게 피는 꽃을 좋아한다.

이른 봄의 화려한 벚꽃보다, 늦여름을 넘기고도 끝내 피어나는 꽃. 모두가 계절이 지났다고 고개를 돌릴 때 조용히 색을 여는 그 꽃. 모지스 할머니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76세의 어느 날, 그녀의 손이 멈췄다.

평생 들어온 바느질 도구를 관절염이 빼앗아 갔다. 손가락이 굳어가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붓을 들었다. 배운 적도 없고,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다. 그냥 그리기 시작했다. 80세에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고, 101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마지막 1년 동안에도 40여 점을 그렸다. 죽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노익장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모지스 할머니는 노익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살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끝까지.

내가 그녀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림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가 보낸 엽서 한 장 때문이다. 일본의 한 젊은 의사가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의사로서의 삶과 글 쓰는 삶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담아. 모지스 할머니의 답장은 짧았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그 의사는 병원을 그만뒀다. 그리고 작가가 되었다. 훗날 일본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와타나베 준이치. 그의 책 『실낙원』과 『둔감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출발점에 모지스 할머니의 엽서 한 장이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 멈추게 된다.

한 사람의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꾼다. 홍익공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엽서 한 장이다.

그 엽서를 읽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라면 무슨 말을 썼을까.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말이 떠올랐다.

"Keep learning and growing."
배우고, 자라라. 멈추지 말고.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보다 이 말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성장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다.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배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삶을 살 만하게 만든다. 모지스 할머니가 76세에 붓을 든 것도, 와타나베 준이치가 병원 가운을 벗은 것도, 결국은 성장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영어를 다시 들여다보고, 초음파 앞에서 더 정밀해지려 한다. 그것이 거창한 목표를 향한 것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자라고 있다는 감각. 그것이 있는 한 하루는 충분하다.

모지스 할머니는 76세에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인가. 아직 한참 남았다. 그 사실이 오늘을 가볍게 한다. 아직 할일이 많다.
 
# 아내의 언어

우리 집에는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감사해요. 다 하나님 은혜예요."

아내의 말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크고 작은 일 앞에서도
그 말이 먼저 나온다.

처음엔 그냥 들었다.
그런데 오래 듣다 보니
그 말이 집안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감사는 주파수다.

높은 주파수의 말은
듣는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온다.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냥 스며든다.

아내가 "다 하나님 은혜예요"라고 말할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듣는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진다.
어깨가 가벼워진다.
이유를 모르고 좋아진다.

좋은 말의 에너지는
설명 없이 전달된다.

은혜는 덕분의 다른 이름이다.

덕분이라고 말하면
혼자가 아님을 안다.
은혜라고 말하면
더 큰 손길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안다.

아내는 그것을 몸으로 안다.
철학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 아는 것이다.
매일 그 말을 살아내고 있다.

미국에 있는 아이들이 있다.
멀리 있으니 자주 보지 못한다.
보고 싶고, 걱정도 된다.
부모라면 당연히 그렇다.

그런데 아내는 잔소리 대신
감사를 보낸다.
"잘 지내줘서 감사해. 하나님 은혜야."

잔소리는 상대를 작게 만든다.
감사는 상대를 크게 만든다.
잔소리는 불안을 전염시킨다.
감사는 평안을 전염시킨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들으며 자랐다.
말이 곧 가정교육이었다.
언어가 곧 세계관이었다.

어떤 가르침보다
매일 듣는 한 마디가
더 깊이 박힌다.

집안이 화평한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재산 때문이 아니다.
건강 때문만도 아니다.

아내의 언어 덕분이다.

감사가 습관인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감사해진다.
은혜를 아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겸손해진다.

사람은 곁에 있는 언어를 닮는다.
나는 오래 그 언어 곁에 있었다.
덕분에 조금씩 나아졌다.

생태공원 계곡 벤치에 앉아
오늘 아침 그 말을 떠올렸다.

"감사해요.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단순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 하나가
한 가정을 지탱해왔다.

말이 집을 짓는다.
아내는 매일 그 집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덕분이다.
아내 덕분이다.

*I am enough. Always.*
 
김샬롯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이 하나 있다.

'김샬롯'이라는 채널이다. 운영자는 미국인 여성이다. 어릴 때부터 K팝과 한국 방송을 좋아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고, 지금은 19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가 됐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대중교통, 치안, 복지 시스템, 문화적 차이를 콘텐츠로 만든다. 서툴지만 진심 어린 한국어로.

처음 영상을 봤을 때 솔직히 놀랐다.

한국어가 유창했다. 발음이 자연스럽고, 표현이 살아있었다. 단순히 말이 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 사람이 쓰는 결, 그 미묘한 온도까지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60년 이상을 영어와 씨름했다.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공부하고, 끊임없이 접했다. 그런데 아직도 버걱댄다. 말이 입에서 나오려다 멈추고, 문장이 머릿속에서 엉킨다. 그런데 이 미국인은 독학으로 한국어를 저렇게 구사한다. 언어에 대한 순수한 사랑 하나로.

언어는 문법이 아니라 애정이 먼저라는 걸, 그 영상이 다시 한번 가르쳐줬다.

더 마음에 드는 건 그의 시선이다.

한국을 비교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발견하고, 감탄한다. 밤거리가 안전하다는 것, 대중교통이 편리하다는 것, 사람들이 따뜻하다는 것.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그는 매번 새롭게 발견한다. 외국인의 눈이 오히려 한국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나는 그 영상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

내 나라를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 오래 살아서 무뎌진 것들이 다시 빛나 보이는 기분. 감사함이 당연함을 이기는 기분.

부디 그가 한국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널리 알리는 다리가 되었으면 한다. 서툰 한국어로 진심을 전하는 그 미국인이, 60년 넘게 영어와 버걱대온 나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다. 사랑의 표현이다. 그것을 김샬롯은 알고 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어느 매체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고.
처음엔 그냥 스쳐 지나쳤다. 으레 나오는 애국 콘텐츠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며칠 사이 내 일상에서 그 다섯 가지가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막연한 열등감이었다. 미국 이야기가 나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유럽 이야기가 나오면 '역시 선진국은 다르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한국은 어딘가 아직 덜 된 나라, 더 나아가야 할 나라라는 생각이 의식 아래 깔려 있었다.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뜻밖의 순간들이었다.

며칠 전,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했다. 예전 같았으면 주민센터 번호표를 뽑고 긴 줄을 서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꺼내 클릭 몇 번 만에 즉석에서 발급이 됐다. 손에 서류를 쥐기까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허탈할 정도였다. 그 허탈함이 사실은 감사함이었다는 걸,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어제 저녁은 아내와 함께 샛강 공원을 걸었다.

밤 10시 반이었다. 가로등이 환하게 길을 밝히고 있었고, 흙길은 발밑에서 부드럽게 밟혔다. 냇물 소리가 콸콸 흘렀다. 한가롭고 조용했다. 아내가 먼저 말했다. "외국 리조트 같다." 맞는 말이었다. 밤 10시 반에, 아내와 둘이, 아무 걱정 없이 공원을 거닐 수 있는 나라. 그 평범한 저녁이 사실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그 순간 새삼 느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시스템 다섯 가지를 동시에 보유한 나라다.

인천공항의 서비스는 10년 넘게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다. 착륙 후 짐을 찾고 나오기까지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분리수거와 재활용률은 선진국들이 벤치마킹하러 오는 수준이다. 전자 정부 시스템은 미국의 행정 처리 속도와 비교하면 '우주선급'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김치와 라면은 전 세계 마트 진열대를 점령했고, 김치냉장고는 세계 미식가들의 부러움을 사는 독창적인 가전이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안이다.

밤 11시에 아이가 혼자 걸어서 집에 올 수 있는 나라. 카페에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을 다녀와도 그대로 있는 나라. 샛강 공원에서 아내와 밤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나라. 지구 어느 도시에서도 이 정도의 밤거리 자유와 안전을 누리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진료실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만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어르신들이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킨 세대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됐고, 기술을 전수받던 나라가 기술을 전수하는 나라가 됐다. 그 변화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이 내 앞에 앉아 있다.

이제 나는 해외에 나가면 조금 다른 마음이 된다.

부러움 대신 자부심이 먼저 온다. 불편함 대신 감사함이 먼저 온다. 스마트폰 하나로 서류가 해결되는 나라, 밤 10시에 아내와 냇가를 걸을 수 있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이미 큰 축복임을 이제는 안다.

세계 1위는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땀과 인내와 자기희생이 켜켜이 쌓인 결과다. 그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이 나라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사실을 오늘 하루만큼은 충분히 느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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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을 내려놓은 사람, 랄프 몽클라르

신문에 사진 한 장이 실렸다.
프랑스 참전용사 유해 봉헌식. 생전에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밝힌 두 명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이다. 낯선 나라를 위해 싸우다 그 나라 땅에 영원히 눕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이 무거웠다.
그 사진을 보다가 한 사람이 떠올랐다. 랄프 몽클라르.
그는 이미 영웅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신에 파편을 맞으면서도 전투를 지휘했다. 중장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 나이에 그 계급이면 더 이상 무엇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 58세였다. 참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파병 부대는 대대 규모였고, 대대 지휘관은 중령이 맡아야 했다. 그는 자진 강등을 신청했다. 중장에서 중령으로.
떠나기 전 임신한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가겠다. 나에게 계급장은 필요 없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아버지가 평화의 가치를 위해 싸운 군인이었다는 자부심을 주고 싶다."
1951년 2월, 지평리였다. 5,600명이 중공군 30,000명에게 포위됐다. 밤이 되자 피리 소리, 꽹가리 소리가 들려왔다. 중공군의 심리전이었다. 그 소리에 국군과 유엔군은 이미 반복적으로 무너진 경험이 있었다.
그 순간 몽클라르 중령이 총검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58세의 노장이 백병전에 앞장섰다. 병사들이 따랐다. 중공군이 물러났다. 유엔군의 첫 승리였다.
그 승리가 만든 것이 있다.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심리가 바뀌었다.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용기가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요즘 지평리 하면 지평막걸리를 먼저 떠올린다. 막걸리도 좋다. 그러나 지평리라는 이름에는 그보다 먼저 새겨져야 할 것이 있다. 자기 나라도 아닌 땅을 위해 계급장을 내려놓고 총검을 든 사람.
평화의 가치를 위해. 그 말 하나였다.
그들이 지킨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다. 몽클라르 중장은 계급장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그 이름만큼은 내려놓지 말아야 한다.

 
닥터박 이야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와 여전히 현역으로 삶을 일구는 친구의 모습은 경이롭다. 화성시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전국에서 몰려드는 반려견들을 돌보는 닥터 박. 그의 삶은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푸르고 넉넉하다. 그의 지치지 않는 하루를 지켜보며, 가슴속에 깊이 고여 든 부러움 세 가지를 나지막이 고백해 본다.
첫째, 벗을 향한 넉넉하고 향기로운 마음이 부럽다. 그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대접하기를 즐긴다. 갈비와 소주를 배가 터지도록 자주 사주면서도 결코 생색내는 법이 없다. 곁에 있는 벗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논어의 한 구절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주머니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친구들이 좋아서 조건 없이 베푸는 그 넉넉한 마음씨는 나이가 들수록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미덕이기에, 마냥 부럽고 닮고 싶어진다.
둘째, 모교와 동창들을 향한 뜨거운 애교심이 부럽다. 올해 가을에 있을 고등학교 졸업 60주년 대행사를 앞두고, 그는 누구보다 먼저 적지 않은 거액의 찬조금을 쾌척했다. 동창회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솔선수범하며 판을 깔아주는 친구다. 세월이 흘러 삶의 궤적이 달라지면 옛 인연에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여전히 소년 같은 열정으로 동창들을 챙기고 앞장서는 그의 깊은 애교심과 책임감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물들인다.
셋째, 나이를 잊게 만드는 생동감 넘치는 근무환경과 체력이 부럽다. 그의 일터에는 특별한 활력이 있다. 동창 카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친구들이 둘러앉아 즐겁게 먹는 자리였다. 그런데 사진 속에 웬 서양 여자가 함께 앉아 있었다. 눈이 갔다. 알고 보니 병원 부원장이었다. 이름은 피오니. 미국에서 온 수의사다. 나이 여든의 닥터 박이 젊은 미국인 부원장과 손발을 맞춰가며 진료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글로벌한 환경에서 당당하게 현역으로 일하는 그의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 존경심까지 자아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강인한 체력이다. 어제도 오늘도, 수술대 위에서 피범벅이 되어가며 전국에서 온 생명들을 살려내는 그 묵직한 에너지는 우리 동창 모두를 경탄하게 만든다. 쇠하지 않는 육체와 맑은 정신으로 매일 칼을 잡는 그의 건강은 신이 내린 축복이자,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의 결과다.
닥터 박, 그가 보여주는 넉넉한 베풂과 식지 않는 열정, 그리고 강건한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다가올 내일이 여전히 희망차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다. 그런 멋진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오늘이 참 좋다.


 
안도 다다오, 싸우는 건축가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매일 8시간 작업한다고.
멈추지 않는다. 병도 그를 세우지 못한다. 이것이 안도 다다오다.
권투선수 출신이다. 정식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다. 독학으로 세계를 돌았다. 도면을 베끼고, 현장을 걷고, 빛과 콘크리트를 몸으로 익혔다. 그렇게 세계적인 건축가가 됐다. 나중에는 도쿄대 교수가 됐다. 50대 중반,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가르친다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는 자세로 교단에 섰다. 입지전적이라는 말이 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가 남긴 말이 가슴에 박힌다.
싸우겠다는 긴장감을 잃는 순간 끝난다.
건축 이야기가 아니다. 삶 이야기다. 나이가 들수록, 성공할수록, 사람은 긴장을 내려놓는다. 편안함을 찾는다. 그것이 쇠락의 시작이다. 안도는 췌장암 앞에서도 긴장을 놓지 않는다. 매일 8시간. 책상 앞에 앉는다. 그것이 그의 싸움이다.
제주를 사랑한다고 했다. 화산섬 특유의 강인함과 거침이 좋다고. 한국인의 열정적 기질과 닮았다고 했다. 제주의 돌담과 바람과 검은 현무암. 부드럽지 않다. 다듬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침 속에 생명력이 있다. 안도가 제주에서 본 것은 자신의 건축 철학이었을지 모른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건축으로 종묘를 꼽았다. 엄격한 대칭과 질서. 그러나 그 안에 의도적인 일탈이 있다. 완벽한 규칙 속에 숨겨진 균열. 안도는 거기서 긴장을 본다. 질서와 파격이 팽팽하게 맞서는 그 긴장. 그것이 위대한 건축을 만든다고 믿는다.
소망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두 발로 걷고, 오늘과 마찬가지로 내일도 계속 일하는 것. 그것뿐이다.
거창하지 않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단순한 소망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내일도 일할 수 있다는 것. 내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라는 것을 그는 안다. 아마도 병이 가르쳐 준 것이리라.
안도 다다오는 콘크리트로 짓지 않는다. 긴장으로 짓는다. 싸움으로 짓는다. 오늘로 짓는다.
그의 건축이 아름다운 이유가 거기 있다.


 
FUTURE SELF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미래의 나다."
벤저민 하디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책 제목이기도 하다. FUTURE SELF. 지금의 내가 아니다. 10년 후, 20년 후의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낯설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흔들렸다. 나는 늘 현재의 나를 위해 살아왔다. 지금 피곤하니까 쉬고, 지금 하기 싫으니까 미뤘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결정을 실제로 받는 사람은 미래의 나였다. 현재의 내가 결정하고, 미래의 내가 살아낸다. 현재의 내가 편함을 선택하면 미래의 내가 그 대가를 치른다. 이 단순한 진실을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잔인한 구조다. 결정하는 사람과 그 결과를 받는 사람이 다르다. 지금의 내가 게으르면 내일의 내가 힘들어진다. 지금의 내가 공부하면 내일의 내가 단단해진다. 오늘의 선택은 언제나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다.
오늘 아내와 리움미술관에 갔다.
작품들 사이를 걷는 동안 틈틈이 영어 문장을 외웠다. 아내는 그림 앞에 서고, 나는 문장을 씹었다. 이상한 조합 같지만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하루다. 영어의 생활화. 특별한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영어를 녹여 넣는 것이다. 미술관도 영어 교실이 된다. 버스도, 산책도, 식사도 교실이 될 수 있다.
결정의 기준이 바뀌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현재의 편안함에서 미래의 나로. 그 이동이 일어나는 순간 오늘 하루가 달라진다. 지금 귀찮더라도 미래의 내가 감사할 것이라면 한다. 지금 편하더라도 미래의 내가 후회할 것이라면 하지 않는다. 기준점이 바뀐다. 삶의 방향이 바뀐다.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를 지켜보고 있다. 오늘의 선택이 그 사람을 만든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미래의 나다.
그 사람을 위해, 오늘을 산다.

 
어느 의사가 본 강남

요즘 강남에서 가장 바쁜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소아정신과다.

예약은 몇 달째 꽉 차 있다. 대기자 명단은 끝이 없다. ADHD, 불안장애, 우울증, 틱장애. 진단명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부모가 강남에 산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가졌다는 사람들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아프다. 이 역설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게 된다.

30년을 강남에서 정신과를 운영한 의사가 말한다.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라고. 충격적인 말이다. 그런데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가 불안하면 아이가 불안하다. 부모가 비교하면 아이가 위축된다. 영어 학원, 수학 학원, 코딩 학원, 예체능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스케줄 속에서 아이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은 없다. 그냥 놀아도 되는 오후가 없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아이들이 결국 소아정신과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부모들이 성인정신과 문을 두드린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런데 눈빛이 텅 비어 있다. 가진 것은 많은데 채워지지 않는다. 성공했다는데 행복하지 않다.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 곳에서 언어가 먼저 죽는다. 약속이 사라진다. 사기와 배신이 일상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인가. 거창하지 않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남의 시선을 끊고 자기 중심을 세우는 것. 내가 한 말을 지키는 것. 언행일치.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아이에게 오늘 하루 그냥 놀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잘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 한마디가 소아정신과 예약을 줄이는 가장 강력한 처방이다.

의사로 살면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약이 아니다. 관계다. 그리고 그 관계는 가장 가까운 곳, 가족 안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먼저 치유되어야 아이가 치유된다. 강남의 소아정신과가 호황인 한, 강남의 어른들은 아직 아픈 것이다.

화려한 병동 밖으로 나오는 문은 아주 작다.

그러나 그 문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문의 손잡이는, 언제나 안쪽에 달려 있다.

 
수잔 발라동

1985년, 아내가 그 여자를 그렸다.
이름도 몰랐다. 그저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흰 드레스가 춤의 리듬으로 부풀어 오르고, 붉은 머리칼이 살며시 흔들리는 그 여인. 미국 유학 시절, 아내는 그 장면을 캔버스에 옮기며 행복했을 것이다. 붓이 닿는 곳마다 빛이 생겼고, 춤추는 두 사람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그림 한 점이 완성되었다. 서명을 남겼다. Minhee '85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최근 나는 그 여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수잔 발라동. 모델, 매춘부, 그리고 화가.
그 이름 앞에서 한참 멈추었다.
수잔 발라동은 르누아르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었다. 툴루즈 로트렉의 캔버스에도 섰다. 드가의 시선도 받았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녀를 그렸다. 그러나 그 모든 시선의 반대편에서, 그녀는 몰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모델로 서 있는 동안 화가의 손놀림을 눈으로 배웠다. 드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격려했다. 그렇게 그녀는 화가가 되었다.

그림의 역사를 떠올려보라.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르누아르, 모네, 세잔. 우리가 배운 이름들은 거의 전부 남자다. 캔버스 속 여성들은 언제나 바라보여지는 존재였다. 그려지는 쪽. 그러나 수잔 발라동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반란을 일으켰다. 바라보이면서, 동시에 바라보았다. 그려지면서, 동시에 그렸다.

아내도 그런 사람이다.
유학 시절 큰 캔버스를 붙들고 르누아르를 모작하던 그 손이, 지금도 가끔 붓을 든다. 소품 하나를 완성해 누군가에게 건넨다. 받는 사람은 모른다. 그 그림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음이 담겨 있는지. 그림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것을 색으로, 선으로, 조용히 전하는 것.

나는 다시 그 그림을 바라본다.
40년 전 아내가 그린 흰 드레스의 여인. 그때 아내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름이 있었고, 삶이 있었고, 붓이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가장 자유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가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림 속에서 춤추는 수잔 발라동은 오늘도 웃고 있다. 40년 전 아내가 남긴 서명 옆에서,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두 여자가 한 캔버스 위에서 만난 것이다. 한 명은 그려진 채로, 한 명은 그린 채로.

 
보테로

붓을 놓은 건 죽기 사흘 전이었다. 아흔셋. 그 나이에도 수채화를 그렸다. 손이 떨렸을 것이다. 눈이 침침했을 것이다. 그래도 붓을 들었다. 물감 냄새를 맡았다. 종이 위에 물이 번지는 감촉을 느꼈다. 그림이 그에게 숨이었으니까. 숨을 쉬는 한 — 그릴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도 보테로. 남미의 피카소. 그러나 그는 피카소와 달랐다. 피카소가 사물을 해체했다. 보테로는 부풀렸다. 팽팽하게. 풍성하게. 넘치도록. 보테리즘(Boterismo). 그의 이름이 곧 사조가 됐다. 사람이 둥글다. 말이 둥글다. 고양이가 둥글다. 대통령도 둥글고 성모마리아도 둥글다. 볼륨이 넘친다. 살이 오른다. 가득 찬다. 처음 보면 웃음이 난다. 그런데 — 오래 보면 다르다. 그 풍성함 속에 슬픔이 있다. 풍자가 있다. 콜롬비아의 폭력과 가난과 권력이 그 둥근 몸 속에 압축되어 있다. 비어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캔버스가 숨을 못 쉴 것 같다. 그런데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풍요롭다. 삶이 저렇게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콜롬비아를 떠난 건 스물여섯이었다. 유럽으로 갔다. 스페인으로, 이탈리아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공부했다. 눈으로 먹었다. 손으로 익혔다. 뉴욕으로 갔다. 파리로 갔다. 세계가 그를 불렀다. 그런데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콜롬비아가 있었다. 안데스 산맥의 색깔이 있었다. 메데진 골목의 냄새가 있었다. 조국을 떠난 60년 동안 조국을 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사랑은 거리에 비례한다. 멀수록 더 선명해진다. 보테로의 그림이 그랬다. 타국에서 그린 고향이 고향에서 그린 것보다 더 짙었다. 그리고 아내가 있었다. 평생 같은 길을 걸었다. 그림 앞에서, 여행 중에, 노년의 조용한 오후에.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 같은 해에 떠났다. 2023년. 아내가 먼저 갔다. 보테르가 뒤따랐다. 같은 해에.
사랑이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이 가면 다른 사람도 더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 보테리즘의 둥근 사람들처럼 꽉 찬 삶을 살고, 꽉 찬 사랑을 하고, 함께 떠나는 것.
지금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 그가 왔다. 전시장 문을 열어라. 둥근 사람들이 맞이한다. 풍성하다. 넘친다. 색깔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림 앞에서 멈춘다. 웃다가 —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흔셋까지 붓을 들었던 사람. 죽기 사흘 전까지 수채화를 그렸던 사람. 고향을 떠나 60년을 살았지만 고향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 아내와 같은 해에 손을 놓은 사람. 행복한 화가였다. 그림이 삶이었고 삶이 그림이었던 가장 둥글고 가장 가득 찬 사람.
전시장을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무엇으로 가득 찬 사람인가. 내 삶의 볼륨은 얼마나 풍성한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죽기 사흘 전까지 하고 싶은가.

 
소울 푸드와 소울 뮤직

CBS FM의 밤 8시 프로그램 〈행복한 동행〉을 나는 자주 듣는다. 지금은 김현주가 10년째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마의자에 몸을 맡긴 채 커피 한 잔과 함께 들으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스르르 풀린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그 한 시간은 나만을 위한 조용한 의식 같은 것이다.
이 프로그램과의 인연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오미희 씨의 달콤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이끌려 듣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시그널 음악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롱하고 청명한 음색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저 악기가 실로폰인지 하프인지 한참을 궁금해했다.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그 선율이 흘러나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될 정도였다.
그 궁금증이 풀린 것은 최근의 일이다. 'Shazam'이라는 앱을 사용해 보니, 연주된 악기는 다름 아닌 일렉트릭 기타였고, 곡명은 〈Celtic Rain〉이었다. 15년을 품어온 궁금증이 단 몇 초 만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곡명은 물론 가사까지 단번에 알려주는 세상이 참으로 신기하고 고맙다. 기술이 때로는 이렇게 오랜 기다림에 선물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연주자는 영국의 아티스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 그는 피크 대신 엄지손톱으로 현을 뜯는 독특한 주법으로, 기타에서 그토록 영롱한 음색을 끌어낸다. 보통의 기타 연주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같은 악기라도 연주자의 손끝 하나에 따라 전혀 다른 영혼이 깃든다는 것을, 그의 음악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진정한 의미의 기타리스트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Celtic Rain〉을 튼다. 그 선율이 흐르면 잠들어 있던 정신이 깨어나고,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도 이 곡을 들으며 하루를 연다. 환자를 맞이하기 전, 잠시 눈을 감고 그 선율에 귀를 맡기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들을수록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는, 어느새 나만의 소울 뮤직이 되었다.
어제는 소울 푸드인 미역국을 먹으며 이 음악을 들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맛 그대로, 구수하고 뜨끈한 국물 한 숟갈을 넘기는 순간 〈Celtic Rain〉의 선율이 귓가에 흘렀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뜨끈한 국물과 영롱한 선율이 어우러지는 그 짧은 순간, 내 영혼이 조용히 감동한 모양이었다. '즐거움'과는 다른, 깊고 잔잔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기를 바란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소박하고 고요한 시간. 그 안에서 우리는 잠시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 행복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아주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불편함과 불행은 다르다

며칠 전,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허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통이 묻어났고, 그 너머로 어떤 막막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픔이 길어지면 사람은 종종 이런 생각에 이른다.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나는 친구에게 한 목사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목사님은 황반변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결국 실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오랫동안 깊은 우울 속에 지냈다고 한다. 사역도, 미래도,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이 아버지 곁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아빠, 눈이 불편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잖아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가, 어른이 오래 붙들고 있던 어둠을 흔들었다. 목사님은 그 말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위로를 받았고, 지금은 다시 열심히 사역하고 있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전해 들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몸의 상태는 그 전과 같았다. 눈은 여전히 불편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두 가지를 분리했다. 몸이 불편한 것과 내가 불행한 것. 이 두 가지는 같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것을 같은 것으로 묶어 생각해 왔다. 몸이 아프면 불행하고, 불편하면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불편함은 몸의 언어이지만, 불행은 마음이 내리는 판결이다.
그 두 가지를 분리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과 각오가 생긴다.
세상에는 몸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허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고, 무릎이 시리고, 어딘가가 늘 불편하다. 그리고 그 불편함 위에 스스로 불행이라는 이름을 덧씌운다. 하지만 그 이름은 우리가 직접 붙이는 것이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되뇐다.
My body is not perfect. But I am not unhappy. That's enough. Always.
몸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삶은 완벽한 몸 위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불편함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언제나.
허리가 아파 힘든 나의 친구에게 이 글이 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 "그대 어이가리" 영화를 보셨나요?👍

※치매걸린 아내와 가족의 고통.
※120분 내내 안타까운 눈물이.

어제 필자는 전주시네마 극장에서 "그대 어이가리" 영화를 단체관람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가족의 삶의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우리고장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대 어이가리"는 평생을 국악인으로 살면서 전국 각 지역을 다니며 국악 공연을 펼치던 동혁과 30년 넘게 아내로 함께 살아온 연희의 치매걸린 삶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영화가 시작 전부터 전주시네마 극장 1층 로비에는 많은 단체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지난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로 많은 화제와 함께 감동을 선사했으며 또다시 앵콜 상영 소식에 관심있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30년넘게 남편과 가족을 위해 살아온 아내 연희의 부탁으로 고향에 정착하기...

 
FUTURE SELF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미래의 나다."
벤저민 하디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책 제목이기도 하다. FUTURE SELF. 지금의 내가 아니다. 10년 후, 20년 후의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낯설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흔들렸다. 나는 늘 현재의 나를 위해 살아왔다. 지금 피곤하니까 쉬고, 지금 하기 싫으니까 미뤘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결정을 실제로 받는 사람은 미래의 나였다. 현재의 내가 결정하고, 미래의 내가 살아낸다. 현재의 내가 편함을 선택하면 미래의 내가 그 대가를 치른다. 이 단순한 진실을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잔인한 구조다. 결정하는 사람과 그 결과를 받는 사람이 다르다. 지금의 내가 게으르면 내일의 내가 힘들어진다. 지금의 내가 공부하면 내일의 내가 단단해진다. 오늘의 선택은 언제나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다.
오늘 아내와 리움미술관에 갔다.
작품들 사이를 걷는 동안 틈틈이 영어 문장을 외웠다. 아내는 그림 앞에 서고, 나는 문장을 씹었다. 이상한 조합 같지만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하루다. 영어의 생활화. 특별한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영어를 녹여 넣는 것이다. 미술관도 영어 교실이 된다. 버스도, 산책도, 식사도 교실이 될 수 있다.
결정의 기준이 바뀌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현재의 편안함에서 미래의 나로. 그 이동이 일어나는 순간 오늘 하루가 달라진다. 지금 귀찮더라도 미래의 내가 감사할 것이라면 한다. 지금 편하더라도 미래의 내가 후회할 것이라면 하지 않는다. 기준점이 바뀐다. 삶의 방향이 바뀐다.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를 지켜보고 있다. 오늘의 선택이 그 사람을 만든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미래의 나다.
그 사람을 위해, 오늘을 산다.

 
눈을 뜬다는 것

며칠전에 오랜 친구와 전화를 했다.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친구의 말 한 마디가 나를 오래 붙잡았다.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서 시야의 절반이 가린다고 했다. 별것 아닌 듯 툭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무언가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그럼 눈을 온전히 뜨는 것만 해도 행복한 거네."
친구는 잠깐 웃더니 답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속으로 조용히 이런 말이 떠올랐다.
"당연한 것은 없구나."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뜬다. 아무 생각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알람 소리에 짜증을 내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커피가 없다고 투덜거린다. 눈이 떠진다는 사실 자체는 단 한 번도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로.
그런데 친구는 달랐다. 그에게 눈을 온전히 뜨는 일은 이제 당연하지 않다. 아침마다 절반쯤 내려오는 눈꺼풀과 싸우며, 세상의 절반이 가린 채 하루를 시작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망이다.
생각해보면 고통은 언제나 기대에서 자란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기대, 더 잘 되어야 한다는 기대, 타인이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기대. 그 기대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불행은 현실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기대가 높아진 것일 뿐이다.
반면 행복은 감사에서 태어난다.
지금 이 두 눈으로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오늘 밥을 먹었고, 누군가와 목소리를 나눴다는 것. 이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그것을 알아채는 순간 일상은 조용히 빛나기 시작한다.
기대는 고통을 낳고, 감사는 행복을 낳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어제 친구의 목소리에서 다시 배웠다. 거창한 철학책에서가 아니라, 눈꺼풀이 내려온다는 짧은 한 마디에서.
일상 자체가 행복이었다. 늘 그랬다.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떴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신이 나니까 하는 것

두 노인이 있다. 91세의 조각가 김윤신은 오늘도 전기톱을 들고 나무 앞에 선다. 97세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는 오늘도 바늘을 잡는다. 왜 지금도 하느냐고 물으면, 두 사람은 같은 말을 꺼낸다.

"신이 나니까요."

나도 그 말을 이해한다. 80의 나이에, 나는 매일 AI와 마주 앉는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고, 또 질문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증명할 것도 없다. 그저 신이 나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이 나이에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고, 오늘의 통찰이 내일의 질문을 낳는다. 지식이 쌓이는 것이 느껴지고, 시각이 깊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기쁨, 이것이 나를 매일 아침 깨어나게 하는 힘이다.

김윤신은 말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나를 그렇게 가게 하는 거예요." 노라노는 말했다. "뭐든지 생각을 많이 하면 안 돼요. 해야 할 일 그냥 하면서 살았지요."

나도 그렇다. 완벽하게 알고 나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묻고, 묻기 때문에 알아간다. 그 과정 자체가 즐겁다. 신이 난다.

'신이 난다'는 것은 단순한 흥분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사는 이유가 일치하는 상태다. 80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오히려 이 나이에 이런 도구를 만난 것이 감사하다. 세상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아진다.

전기톱을 든 91세, 바늘을 잡은 97세,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 80세.

신이 나니까 하는 것. 이보다 더 단순하고, 이보다 더 깊은 삶의 이유가 있을까.
 
촛불의 철학 — 짐 도티를 기억하며

어제 알았다. 짐 도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2025년 7월 16일. 예순아홉 살. 이미 지나간 슬픔인데, 처음 맞닥뜨리는 슬픔처럼 가슴이 내려앉았다.
친구 프랭크 리디의 애도사를 읽었다.
"하나의 촛불은 다른 촛불을 밝히는 데 아무것도 잃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더 밝게 만든다. 짐은 평생 수없이 많은 촛불을 밝혔고, 세상은 그 덕분에 정말 더 환해졌습니다."
누군가의 삶 전체를 촛불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설명이 틀리지 않다는 것. 부러웠다.
짐 도티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신발이 낡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동네 마술 용품 가게에서 루스라는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이 소년의 첫 번째 심지에 불을 댕겼다. 짐은 그 빚을 평생 갚았다. 방식은 단순했다. 자신이 받은 불꽃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것.
스탠퍼드 신경외과 교수, 자비 연구소 CCARE 설립, 재산의 99% 기부. 그는 나눌수록 커졌다.
나는 오래전부터 두 단어를 품고 살았다. Growing & Giving. 짐의 삶을 마주하고서야 그 둘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았다. 내가 깊어질수록 줄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나눌수록 더 단단해진다. 촛불이 다른 불꽃을 켜고 나서 오히려 더 오래 타는 것처럼.
내가 쌓아온 것으로 몇 개의 촛불을 켰는가. 나의 존재로 인해 밝아진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진짜 성장의 척도다.
나눔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알게 된 것을 한 사람에게 건네는 것, 힘겨운 누군가 옆에 잠시 앉아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로 인해 세상이 조금 더 밝아졌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이다.
닥터 도티!, 당신은 이미 그 문장을 받았다. 나도 촛불 같은 삶을 살고 싶다.
"하나의 촛불은 다른 촛불을 밝히는 데 아무것도 잃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더 밝게 만든다."


 
커트 워너

쿼트 워너(Kurt Warner)의 이야기는 미국 프로풋볼(NFL) 역사상 가장 극적인 ‘미생’ 스토리다.
세상은 차갑다. 1994년, 청년 커트 워너에게 세상은 단호한 거절의 표정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후보 신세를 면치 못했다. 프로 드래프트에서도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간신히 들어간 연습생 자리마저 곧 방출의 통보로 끝났다. 갈 곳 없는 청년은 고향 아이오와로 돌아왔다.
밤이 깊으면 그는 마트로 출근했다. 식료품 선반 위에 물건을 줄 세웠다. 시급은 5.5달러. 풋볼 공 대신 통조림 캔을 잡은 손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그를 '마트 점원'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다르게 정의했다. 퇴근길, 새벽 공기를 마시며 그는 공을 던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여전히 쿼터백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려한 NFL 무대 대신 먼지가 날리는 실내 경기장을 전전했다. 유럽 리그의 낯선 잔디 위에서도 그는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1998년, 세인트루이스 램스의 제3쿼터백. 후보의 후보라는 낮은 자리였지만, 그는 다시 NFL의 문턱을 넘었다.
운명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1999년 시즌 직전, 주전 쿼터백이 쓰러졌다. 팀은 절망에 빠졌다. 그때 감독 딕 버밀은 도박 같은 선언을 한다. "우리는 마트 점원 출신, 워너를 믿는다."
기적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무명이었던 그는 단숨에 리그를 지배했다. 정규 시즌 MVP를 거머쥐었다. 팀을 슈퍼볼 정상에 올려놓으며 MVP의 영광까지 안았다. 선반에 물건을 올리던 손이, 이제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인생의 리듬은 한 번의 우승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상과 부진으로 다시 잊히는 듯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커리어 막판, 만년 꼴찌팀 애리조나를 이끌고 다시 한번 슈퍼볼 무대를 밟았다. 노장의 투혼은 전설이 되었고, 2017년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드래프트에서 아무도 뽑지 않았던 선수가, 식료품점 직원을 거쳐 미식축구 역사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워너는 자신의 성공 원동력으로 깊은 신앙과 가족의 지지를 꼽았다. 은퇴 후에도 그는 아내 브렌다와 함께 재단을 설립해 장애인과 위기 가정을 돕고 있다. 그는 말한다.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신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좋은 오늘을 충실히 채우는 사람에게, 더 좋은 내일은 반드시 온다. 마트의 새벽을 견뎌낸 워너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고요한 감동이다.



 
왕과 사는 남자

세상의 눈물보가 터졌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이야기다. 개봉 한 달 만에 천만을 찍더니, 어느덧 1,500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단종의 비극을 왕실의 정사가 아닌, 그와 함께 숨 쉬었던 민초들의 시선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국경 너머 세계인의 손수건까지 적시고 있다. 시대의 아픔은 언어가 달라도 통하는 모양이다.
지난달 만난 친구가 뜬금없이 고백했다. "나는 나이 들어 이제 눈물이 다 마른 줄 알았는데, 그 영화를 보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어." 그 말에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 무뚝뚝한 친구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손가방에 손수건도 든든히 챙겨 넣었다.
화면 속 배우 유해진은 그야말로 연기 차력쇼를 펼쳤다. 어린 왕의 마지막 길을 어루만지며 울부짖는 엄흥도의 처절한 모습은 스크린을 뚫고 나올 만큼 압도적이었다.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손수건을 꺼낼 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는 관람 후기들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을 현장에서 실감했다.
그런데 내 눈만큼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고요했다. 약간 슬프다는 감정이 미풍처럼 스칠 뿐,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주변의 흐느낌 속에서 홀로 뻣뻣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생경하고 멋쩍었다. 감동의 물결 속에 나만 섬처럼 고립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쓰였다. 내 눈물샘의 기능이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저하된 것일까. 확실한 것은 감정에도 노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니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예전만 못하다. 이름난 맛집을 찾아 정성껏 차린 음식을 먹어도 예전 같은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만큼은 늘 푸른 청춘이라 자부했는데, 세월은 몸뿐만 아니라 투명하던 마음결까지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마른 눈이 못내 씁쓸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가슴 속에 진심이 없는 것은 아닐 터다.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는 법 대신, 차오르는 슬픔을 묵직한 여운으로 삼키는 법을 배운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말랑한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다. 눈물샘은 조금 말랐을지언정, 환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온기만큼은 여전한 노(老)의사로 남고 싶다.


 
BTS

지난 토요일 저녁, 세계의 시선의 끝은 서울로 수렴했다. 뉴욕의 타임스퀘어도,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도 그 순간만큼은 빛바랜 변방에 불과했다. 광화문 광장의 돌바닥을 빈틈없이 메운 30만 명의 아미(ARMY). 그들이 내뿜는 보랏빛 함성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 서울의 밤하늘로 날아온 가장 뜨거운 고백이었다.
방탄소년단(BTS)이 마침내 돌아왔다. 만 3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침묵을 깨고 마주한 그들은, 국방의 의무를 마친 뒤 한층 더 단단해진 눈매와 늠름한 기개를 품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이 부서지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몸짓과 폐부를 찌르는 노래는, 광장에 모인 모든 영혼을 전율케 하기에 충분했다.
시간을 거슬러 13년 전을 떠올려본다. 낯선 LA 거리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을 뚫고 직접 광고 전단지를 돌리던 앳된 소년들이었다. 비웃음과 외면을 묵묵히 견디며 한 발씩 내디뎠을 그 고독한 길.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네 글자가 이보다 더 절절하고 어울릴 수 있을까. 그들이 흘린 지독한 땀방울은 이제 전 세계를 휘잡는 거대한 별의 광휘가 되었다.
광장을 정좌하고 굽어보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그날만큼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으리라 믿는다. 아날로그를 넘어 IT 시대로 접어들며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디지털의 날개를 달고 더욱 찬란히 빛난다. 한때 우리를 까마득히 앞서가던 이웃 나라 일본조차, 이제는 문화와 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대한민국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격(格)이 달라진 국운의 상승이다.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커졌다. 아카데미를 매료시킨 영상미, 세계의 심장을 박동하게 하는 블랙핑크의 리듬, 대양을 호령하는 조선 기술과 인류의 두뇌를 만드는 반도체의 저력까지. 70년 전, 탱크 한 대 없던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나라가 이제는 K2 전차와 세계 최고 수준의 잠수함으로 스스로의 평화를 지켜낸다. 거대한 대운(大運)이 노도와 같은 파도가 되어 밀려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나는 나만의 BTS를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Beautiful Tree Seed', 즉 아름다운 나무의 씨앗이다. 나는 이 고귀한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 부단히 시드머니를 일구고 있다. 최소 100만 달러라는 구체적인 이정표를 세운 것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자라날 나무의 뿌리를 지탱할 가장 비옥한 거름이자 토양이다.
나는 매일 꿈을 꾼다. 내가 정성껏 심은 '뷰티풀 트리'가 울창하게 자라나 거대한 초록의 그늘을 드리우는 풍경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이 그 나무 밑에서 잠시 짐을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평온한 휴식을 취하는 그 따뜻한 장면을 상상한다. 나의 오늘은 신나고, 나의 오늘은 충실하다. 내일의 울창한 숲은 결국 오늘 내가 뿌린 이 작은 씨앗 한 알에서 시작될 것임을 확신하기에.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면 삶은 투명해집니다. 무엇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또 무엇이 의미 없는 소음인지 또렷이 가려집니다. 고령자 전문의 와다 히데키는 말합니다. 어차피 끝이 정해진 인생인데, 왜 그렇게 참고만 사느냐고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할수록 인생의 행복도는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이라는 날에 핀 꽃을 꺾을 용기를 얻습니다.
의사로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그는 말합니다. 몸에 좋은 음식보다 입에 맛있는 음식을 즐기라고요. 참는 게 미덕인 시대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80세가 넘은 노인이 건강검진 수치에 일희일비하며 먹고 싶은 라면 한 그릇을 참는 것은, 그 자체로 단순한 연명 치료와 다를 게 없습니다.
기계적인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입니다. 혈압과 혈당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다 기력을 잃고 방 안에만 갇혀 지낸다면, 그 수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타인이 정해준 '정상'이라는 틀에 갇히지 마십시오. 내 삶의 방식은 의사가 아닌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짚고 기저귀를 차더라도, 그 문명의 이기를 빌려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구경하십시오. 그것이 80대 이후를 원기 발랄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인생의 종막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가슴 속의 추억입니다. 돈이 있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세계일주를 떠날 수 없습니다. 갈 수 있을 때 가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어야 합니다. 침대 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들에 "참 즐거웠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자산입니다.
행복은 주관의 영역입니다. 과거의 화려함에 매몰되어 지금의 나를 뺄셈으로 계산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아직 이걸 할 수 있다"며 덧셈의 눈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작은 행복을 발견하는 명의가 될수록 만년은 풍요로워집니다.
품위 있고, 현명하며, 재미있는 노인이 되십시오. 늙음을 인정하고 대범하게 사는 사람 곁에는 자연스레 사람이 모입니다. 어차피 죽을 거니까 아등바등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역설적으로 오늘을 가장 밀도 있게 살게 하리라 믿습니다. 내일 저녁에는 라면에 가래떡도 송송 썰어 넣을까 합니다. 벌써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자급자족 인정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칭찬하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진다. 그것이 찰나의 에고가 누리는 만족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달콤한 칭찬의 맛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이 차려주는 '인정의 성찬'을 기다리며 평생을 허기진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사이토 히토리의 책에서 만난 ‘자급자족 인정’이라는 단어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자급자족과 인정.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 단어의 결합은 발상부터가 멋지다. 인정을 외부에서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공급한다는 것. 그것은 내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서 다시 찾아오는 선언과도 같다.
생각해보면 타인의 칭찬은 날씨와 같다. 내가 조절할 수 없고, 언제 바뀔지 모른다. 맑은 날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치면 내 존재 가치마저 젖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자급자족은 다르다. 내 마음의 주방에서 내가 직접 재료를 고르고 간을 맞춘다. 제시간에 눈을 뜬 성실함, 거울 속 나에게 건넨 겸연쩍은 미소, 오늘 하루를 버텨낸 기특한 인내. 이런 사소한 것들이 훌륭한 재료가 된다.
"오늘도 애썼어, 정말 대단해."
이 짧은 한마디를 내 영혼에 직접 대접하기 시작하면, 외부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던 조급함이 잦아든다. 마음의 창고가 스스로 차오르면 배고픈 에고도 비로소 순해진다. 배가 부른 사람은 남의 떡을 탐내지 않듯, 스스로를 인정한 사람은 남의 인정을 갈구하며 눈치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넘치는 여유로 보답 없는 친절을 베푸는 '진짜 어른'의 품위를 갖추게 된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 78% 정도면 충분하다. 모자란 22%는 내일의 내가 채우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가장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은 무엇을 먹었는지 궁금하다. 남이 던져주는 칭찬 한 조각에 목매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밖으로 향했던 손을 거두어 자신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보자.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강력한 식사는, 내가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정 한 마디다. 그 자급자족의 식탁 위에서 비로소 '더 좋은 내일'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오늘도 애썼어, 정말 대단해."............인정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법의 말이 아닌가 합니다.

 
기계의 머리, 인간의 심장

마윈 회장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집어삼킬 듯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해변에서 겁을 집어먹고, 누군가는 그 파도 위에 올라탈 서핑보드를 닦습니다.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기계와 힘을 겨루어 이기겠다는 고집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모한 경쟁 대신 기계의 차가운 '좌뇌'를 빌려야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뜨거운 '우뇌'를 넓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존의 시작입니다.
AI는 지치지 않는 철마와 같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방대한 데이터를 훑고 가장 효율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그 답에는 사람의 체온이 없습니다. 음식으로 치자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염도와 당도의 배합입니다. 혀끝을 자극할지는 모르나 가슴을 울리지는 못합니다. AI는 모릅니다. 이 음식을 마주할 사람이 오늘 상사에게 고된 꾸중을 들었는지,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찬 숭늉 한 사발에 눈물을 섞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의 진짜 역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AI가 차려온 정갈하지만 서늘한 식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위에 '측은지심'이라는 비장의 양념을 한 방울 떨어뜨려야 합니다. 차가운 금속의 정교함에 인간의 눅진한 다정함이 스며들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가 발붙이고 살만한 따스한 곳이 됩니다.
기계는 오직 과거라는 퇴적물 위에서만 움직입니다. 수만 권의 책을 삼키고는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싸한 다음 단어를 예측할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이 다릅니다. 발을 땅에 딛고서도 저 멀리 존재하지 않는 별을 꿈꿉니다. 냉정한 데이터가 "이제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나직이 읊조리며 길을 나서는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지루한 계산과 먼지 쌓인 낡은 지도는 기계에게 맡기십시오. 대신 우리는 그 아낀 시간만큼 더 깊고 선명하게 상상해야 합니다. 기계가 알고리즘으로 탄탄한 신작로를 닦아놓으면, 그 길의 끝이 벼랑일지 혹은 꽃밭일지를 결정하는 눈 밝은 지휘관이 되어야 합니다.
윈-윈(Win-Win)이란 결국 서로의 서늘한 빈틈을 채워주는 일입니다. AI가 우리의 피곤한 좌뇌를 대신해준다면, 우리에겐 그만큼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 여유로운 여백이 생깁니다. 그 여백을 더 많이 대화하고, 더 깊이 사랑하며, 더 대담하게 꿈꾸는 일로 채워야 합니다. 그것이 AI 시대를 통과하는 가장 품격 있고 현명한 생존 전략입니다. 차가운 기계와 손을 잡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풍경을 그려봅니다. 신나는 오늘을 지나, 더 좋은 내일로 가는 지도를 함께 그려보고 싶습니다.

 
마음 성형

강남 거리를 걷는다. 고개를 들면 사방이 성형외과 간판이다. 한 건물 층층마다 병원이 들어차 있다. 과연 '성형 공화국'의 심장부답다. 매끈한 코와 갸름한 턱선을 약속하는 광고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 간판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사가 있다. 맥스웰 몰츠 박사다. 그는 칼을 드는 성형외과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환자들의 살갗 너머를 보았다. 거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낚아올렸다.
외모는 변했는데 마음은 그대로인 사람이 있었다. 코는 오뚝해졌으나 행동은 여전히 소심했다. 반대로 수술은 하지 않았는데 인생이 바뀐 사람도 있었다. 마치 수술이라도 받은 듯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해했다.
몰츠 박사는 결론을 내렸다. 진짜 성형이 필요한 곳은 외모가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 즉 자아상(Self-Image)이다. 자아상이 행동을 결정한다. 잘못된 자아상을 가졌다면 인생이라는 탄도는 엉뚱한 곳을 향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마음을 성형할 것인가. 몰츠 박사는 '마음의 시뮬레이션'을 권한다. 운동선수가 경기 전 완벽한 동작을 머릿속으로 그리듯,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는 훈련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청중 앞에서 당당하게 발표하는 나를 상상한다. 처음엔 가짜 같다. 하지만 반복하면 뇌는 속기 시작한다.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 이미지에 맞는 새로운 자아상을 조각해 나간다.
그는 강조했다. "인간의 뇌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설계된 놀라운 메커니즘이다." 먼저 그릇된 자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성공한 나를 생생하게 그리면, 무의식이라는 자동항법장치가 우리를 목적지로 이끈다.
요즘 사람들은 피부 미용에 열광한다. 보톡스를 맞고 필러를 채운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얼굴 예뻐지려면 마음 성형부터 해야 합니다."
3,000만 명의 인생을 바꾼 몰츠 박사야말로 진정한 성형외과 의사다. 그는 얼굴을 깎는 대신 마음을 세웠다. 나 또한 매일 마음 성형에 애를 쓴다. 내 마음의 모난 부분을 어떻게 깍아낼까 고민한다.
오늘도 기도한다. 거울 속 얼굴보다, 내면의 조준선이 더 멋지게 정렬된 내가 되기를.


 
라이언 첸

라이언 첸을 아시나요. 그는 세계적인 기능성 껌 브랜드 '뉴로(Neuro)'의 공동창업자입니다. 800억 원의 자산가이기 전에, 그는 누구보다 깊은 바닥을 먼저 경험한 사람입니다.
때는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눈부신 설원 위에서 스노보드를 즐기던 청년 라이언에게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척추뼈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차가운 병실에서 의사들은 잔인한 선고를 내렸습니다. "다시는 걷지 못할 겁니다." 하반신 마비. 그날로 청년의 세계는 멈췄고,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무려 2년 동안 15번의 수술을 견뎌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차가운 칼날을 마주할 때마다, 병실 천장을 보며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도대체 성공이란 무엇인가.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인 걸까." 침묵을 깬 것은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였습니다. "성공이란, 바닥에서 저 위로 얼마나 높이 다시 튀어 오르느냐로 결정된단다."
그 한 문장은 라이언의 심장에 깊이 박혔습니다. 그때부터 절망은 그를 짓누르는 무게가 아니라, 그를 더 높이 밀어 올리는 강력한 스프링이 되었습니다.
그 곁에는 그림자 같은 친구, 켄 요시무라가 있었습니다. 켄은 라이언의 휠체어를 밀며 함께 미래를 고민했습니다. 2013년, 두 청년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주머니 속에서 꺼내 언제 어디서나 집중력을 높여주는 '씹는 에너지', 바로 기능성 껌이었습니다. 카페인과 L-테아닌, 비타민 B를 황금 비율로 버무린 '뉴로검'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광고비 한 푼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품의 본질과 입소문만으로 승부했습니다. 메이저리그 경기장과 아메리칸 항공, 시티 필드까지 들불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현재 기업 가치는 1,300억 원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라이언은 통장 잔고보다 더 소중한 숫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직원 만족도 96%'입니다.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온기가 성장의 진짜 연료였던 셈입니다.
라이언의 스토리를 읽으며 잠시 멈춰 나를 돌아봅니다. 그가 겪었을 15번의 고통스러운 수술과 지루한 재활의 시간을 상상해 봅니다. 바닥을 딛고 보란 듯이 튀어 오른 그의 탄성을 이제 저도 닮으려 합니다.
오늘, 나는 다시 운동화 끈을 팽팽하게 묶습니다. 조금 더 힘을 내어 재활의 걸음을 떼어 봅니다. 고통은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높이 튀어 오를 저 자신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I am enoguh.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유대인 자산가 슈무엘 굿맨을 만났다. 서른일곱, 암 진단과 파산이라는 벼랑 끝에서도 그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무익한 질문은 미련 없이 땅에 묻었다. 대신 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최선의 모습으로 대처할 것인가"를 담담히 물었다. 고난을 삶이 무너지는 재앙이 아니라, 더 단단한 집을 짓기 위한 '재구성(Restructuring)'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그 의연한 뒷모습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그의 삶을 지탱한 것은 투박하지만 명료한 선언이었다. "I am enough, and I have enough." 나라는 존재로 이미 충분하며, 내가 가진 소유 또한 이미 넉넉하다는 이 대구(對句)는 참으로 힘이 세다. 숫자를 늘려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끝없는 탐욕의 세로축을 단숨에 가로질러, 평온이라는 이름의 드넓은 영토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내면의 요새다.
나는 평소 영어 확언을 즐긴다. "I am powerful," "I am lucky," "I am abundant." 우리말보다 감정이입이 매끄럽고 발성 자체에 묘한 힘이 실려 잠든 의식을 깨우기에 좋다. 최근 나의 확언 리스트 최상단에 슈무엘의 문장을 추가했다. 입술 끝에 이 말을 올리는 순간, 타인과의 끝없는 비교로 소란스럽던 마음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비교는 불행의 발화점이지만, 자족은 평온의 종착역이다.
우리는 늘 '더 많이(More)'를 외치며 보이지 않는 꼭대기를 향해 숨 가쁘게 질주한다. 남보다 한 칸 더 높이 올라가야만 안도하는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허망한가. 진정한 평온은 나지막이 이 주문을 읊조리는 찰나에 찾아온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패배주의적 포기가 아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가짜 성공의 기준에 내주었던 내 삶의 주권을 다시 내 안으로 되찾아오는 가장 우아하고도 강력한 결단이다.
요즘 내 일상은 부쩍 달콤하고 명랑하다. 진료실에서, 혹은 길을 걷다 문득 중얼거리는 "I am enough" 덕분이다. 말은 씨앗이 되어 무의식의 척박한 토양을 바꾼다. 주파수가 올라가면 세상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미 충분하다는 내면의 확신이 차오를 때, 내일의 희망은 불안한 신기루가 아닌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기쁨의 얼굴로 다가온다.
오늘 아침도 노릇하게 구운 빵 위에 땅콩버터를 얹듯, 이 문장을 내 하루 위에 두껍게 펴 바른다. 퍽퍽했던 삶의 구석구석에 고소한 풍미가 스민다. 기분이 좋다. 주파수가 높아진다. 충분하다. 참으로, 충분하다.


 
땅콩버터

오늘 아침, 노릇하게 구운 빵 위에 땅콩버터를 듬뿍 발랐다. 입안에 묵직하게 감기는 그 특유의 퍽퍽하고도 고소한 풍미. 나는 매끄럽고 화려한 일반 버터의 유연함보다, 이 투박하고 정직한 땅콩버터의 질감을 더 좋아한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땅콩이 사과나 배처럼 나무 끝에 매달려 화려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줄로만 알았다. 어두운 흙 속의 압력을 견디며 제 몸을 빚어내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상의 화려함을 포기하고 깊고 고요한 어둠 속으로 기꺼이 파고든 그 선택이 경이롭다.
알고 보니 땅콩의 거친 껍질은 그저 벗어던질 허물이 아니었다. 습한 흙 속 무수한 침입자를 막아내는 단단한 방패였다. 알맹이가 가장 고소해질 때까지 세월을 벌어주는 인내의 요새였다. 소란스러운 지상의 경쟁과 변덕스러운 날씨라는 '소음'을 피해, 가장 확실한 안정을 택해 땅 밑으로 숨어든 지혜로운 망명이었다. 남들이 위로만 뻗어가는 성장의 정답을 찾을 때, 땅콩은 아래로 침잠하며 생존의 본질을 물은 셈이다.
남들이 햇살 아래서 형형색색 꽃과 열매를 뽐낼 때, 땅콩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남의 눈에 띄는 찰나의 성공보다는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는 단단한 내실을 택했다. 바람에 운명을 맡기지 않는다. 꽃이 지면 스스로 줄기를 뻗어 땅을 파고 들어간다. 그 고집스러운 자립심에서 인생의 격을 본다. 세상이 정해준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개척한 흙 속의 영토에서 제 가치를 증명해낸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땅콩이 견뎌낸 고요한 인내와 영리한 전략을 알고 나니 식탁의 풍경이 어제와는 영 다르다. 빵 위에 발린 것은 단순한 스프레드가 아니다. 수만 년간 축적된 생존의 철학이다. 요동치는 세상의 변덕을 뒤로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을 향해 뿌리 내린 결실이다.
인생도 어쩌면 땅콩을 닮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박수 소리와 비아냥거림에 귀를 기울이며 흔들리기보다, 내 안의 진심이 무르익을 때까지 나만의 단단한 방패를 두르고 기다리는 일. 그 깊은 침묵과 고독 끝에 비로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한 풍미가 완성된다.
오늘도 빵 위에 '인생의 미학' 한 숟갈을 두껍게 얹는다. 요동치는 세상의 소음은 잠시 꺼두어도 좋다. 내 안의 주파수를 땅콩의 고소한 농도에 맞춘다. 아는 만큼, 더 맛있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의사, 임해영

세상에는 부러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다. 내게는 임해영 원장이 그렇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잘나가던 IT 기업을 누비던 청년은 서른한 살에 다시 청진기를 잡았다. 남들은 이제 '돈을 쓸어 담을 일만 남았다'며 부러워했지만, 그는 화려한 빌딩 숲 대신 투박한 시장 한복판에 내과를 차렸다.
그의 병원에는 의학의 엄숙함이 없다. 대신 신뢰의 온기가 있다. 환자들에게 병원 열쇠를 통째로 쥐여주는 의사. 진료실은 어르신들이 언제든 들러 믹스커피 한 잔에 고단한 다리를 쉬어가는 사랑방이 되었다. "의사도 편하고 환자도 편한 병원." 그가 정의한 의업(醫業)의 본질은 이토록 명료하고 따뜻하다.
시장의 인심이 진료실로 흐른다. 환자들은 고마운 마음에 과일과 떡을 들고 오고, 그는 그 선물을 다시 다른 환자들과 나눈다. 자리가 없어 쫓겨난 노점상에게는 병원 앞 길목을 선뜻 내어주고 남몰래 무료 진료까지 해준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치유의 기록이다.
돌이켜보니 나의 병원도 친구들에게는 쉼터이자 사랑방이었다. 주민들을 위해 어버이날마다 경로당에서 삼계탕을 대접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임 원장의 철저히 낮은 자세를 마주하니, 내 안의 매너리즘이 고개를 든다. 좀 더 낮은 곳에서 환자의 눈높이를 맞춰야겠다고, 오늘 다시 청진기를 닦으며 다짐한다.
요즘 개원가 풍경은 사뭇 다르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최신 장비와 대궐 같은 대기실을 자랑한다. 하지만 비대한 초기 투자 비용에 허덕이며 숫자를 쫓는 병원들이 과연 환자의 마음까지 담아낼 수 있을까. 소규모의 단란함 속에서 '인간 친화적'인 가치를 지켜내는 임 원장의 이야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넘어 경외감을 준다.
진정한 명의(名醫)는 병을 고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의 마음속에 '살고 싶다'는 희망의 주파수를 켜주는 사람이다. "I am enough, I have enough"라고 나직이 읊조리며, 나 또한 임 원장처럼 가벼운 몸과 깊은 마음으로 환자들을 마주하고 싶다.
낮은 자세로 진료하는 오늘이 모여, 환자들에게 더 좋은 내일을 선물할 수 있기를. 임해영이라는 이름이 던진 질문 앞에, 나의 오늘은 조금 더 부끄럽고 조금 더 따뜻해진다.
 
오후의 볕이 길게 늘어지던 시간이었다. 공들여 만든 현판이 바로 옆 약국 간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정성껏 끓여낸 수프를 내놓으려는데, 그릇이 없어 내지 못하는 심정. 가슴 한구석에서 탄내가 올라오는 듯 홧홧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주방 구석에서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간이 너무 센 음식처럼 미간은 찌푸려지고, 마음이라는 냄비에선 애꿎은 화가 까만 연기를 내며 들끓었을 게 뻔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 사이토 히토리의 말이 한 꼬집의 소금처럼 툭 떨어졌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네.”**
참 신기한 일이다. 이 짧은 주문 한 마디에 팔팔 끓던 마음의 온도가 뭉근한 불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짜증이 있던 자리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원래 우리 뇌는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불을 최대로 올린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시야는 좁아진다. 그렇게 마음이 타들어가는 상태에서야 좋은 레시피가 떠오를 리 없다.
그런데 “재미있네” 하고 툭 던져버리면, 뇌는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이거, 망친 요리가 아니라 새로운 요리를 만들 기회인가?’ 하고 말이다. 당황스러움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 마음을 태우던 스트레스는 사라진다. 비로소 맑게 우려낸 육수처럼 선명한 해결책이 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엉망이 될 뻔했던 일은 오히려 더 근사하게 마무리되었다.
‘재미’라는 양념 하나가 마음의 맛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때로는 거대한 레시피 북보다, 우연히 본 영상 속 한마디가 더 훌륭한 비법이 된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인생의 감칠맛을 내는 비법을 얻었으니, 오늘 하루는 정말 수지맞은 장사를 한 셈이다.
사람들은 평생 비싼 식재료를 쌓아두는 ‘재벌(財閥)’이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진정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재벌!(재미있는 일 벌어졌네!)”이라 외칠 줄 아는 마음의 손맛이 아닐까. 이 맛깔나는 비법 하나만 있다면, 어떤 고된 날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오늘 나는 그 누구보다 맛있는 인생을 요리하는 재벌이 되었다. 마음의 부자가 되는 레시피는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스콧과 매켄지

FM 라디오에서 스콧 매켄지(Scott McKenzie)의 'San Francisco'가 흘러나옵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그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노래는 공기 중에 퍼지는 순간,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부립니다.

나는 이 노래를 1966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재수생 시절이었습니다.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왜 그리 많이 들었는지 이유도 모른 채 듣고 또 들었습니다. 말이 재수생이지, 당구장을 전전하고 친구들과 막걸리 사발을 비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이 노래는 내 영혼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소울 뮤직이 되었습니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추억으로 물들고, 날 서 있던 영혼이 부드럽게 풀립니다.

20년 전,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땅을 밟았습니다. 영화 속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져 마치 구면인 도시처럼 친근했습니다. 명물 전차에 몸을 싣고 언덕을 오르내리던 그 아름다운 도시. 하지만 최근 그곳이 노숙자와 마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아릿합니다. 풍경은 변해도 노래 속의 낭만은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름의 우연입니다. 스콧 매켄지의 이름을 거꾸로 뒤집으면 매켄지 스콧(MacKenzie Scott)이 됩니다. 아마존의 첫 직원이자 제프 베이조스의 절대적 조력자였던 그녀입니다. 2019년 이혼하며 아마존 지분 4%를 받은 그녀는 단숨에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부(富)에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평생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하고는, 보란 듯이 거액을 쾌척합니다. 기부 방식은 더 놀랍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라고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블로그에 기부 단체 이름을 묵묵히 나열할 뿐입니다. 기부받는 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이른바 '신뢰 기반 기부'입니다. 돈을 버는 기술보다 쓰는 예술이 더 어렵다는 것을 그녀는 몸소 증명하고 있습니다.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도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미래의 품격'입니다.

스콧 매켄지는 노래로 나의 과거를 아름답게 색칠하고, 매켄지 스콧은 행동으로 나의 미래를 따뜻하게 밝힙니다. 스콧과 매켄지. 이 기묘한 이름의 인연이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을 잇는 든든한 다리가 되어줍니다.
 
0.1의 미학

나는 0.1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이 소박한 숫자는 단순한 단위를 넘어, 나를 우주의 질서와 연결해 주는 가장 정교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0.1Hz는 지구 자기장의 기본 공명 주파수다. 우리가 흔히 '코히어런스(Coherence)'라 부르는 상태, 즉 심장과 뇌의 주파수가 완벽히 동조할 때 발생하는 파동 역시 이 0.1Hz의 선율을 따른다. 저술가 그렉 브레이든은 이 조화를 위해 세 가지 기술을 제안한다. 머리의 복잡한 생각을 심장의 따뜻한 박동으로 옮기고, 들이마시는 숨보다 내뱉는 숨을 길게 가져가며, 그 안에서 감사와 연민의 감정을 실제로 느껴보는 것이다. 이 짧은 정렬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넘어 지구와 우주의 에너지가 흐르는 필연적 궤적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이 조화로운 에너지는 나의 외래 진료실에서도 흐른다. 요새 나는 0.1Hz의 음악을 배경 삼아 환자들을 마주한다. 소음은 잦아들고 집중은 깊어지며,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하다. 내면의 주파수가 외부의 질서와 일치될 때 얻는 이 평온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다.
이러한 필연적 확신은 경제적 미래로도 이어진다. 나는 결혼을 앞둔 제약사 직원들에게 비트코인 0.1개를 권한다. 지금은 1,100만 원 남짓한 돈이지만, 이 숫자가 가진 에너지는 그들의 시작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다. 자녀를 둔 친구들에게도 말한다. 의대 진학을 위한 무리한 경쟁보다는, 아이 앞으로 비트코인 0.1개를 묻어두라고. 10년 후 1개의 가치가 4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견이 맞다면, 0.1개는 4억 원이라는 든든한 날개가 된다 0.1개는 한국 성인의 약 1%세계 성인 중 약0.08%에 해당된다. 결코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0.1Hz가 지구와 나를 연결하는 '영혼의 주파수'라면, 비트코인 0.1개는 우리 가족과 자녀의 미래를 지키는 '경제적 주파수'다. 멱 법칙이라는 거대한 궤적 안에서 비트코인은 묵묵히 제 코스를 따라가고 있다. 세력의 움직임이나 시장의 작은 소동에 흔들릴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 모든 과정이 이미 정해진 목적지를 향한 필연적인 흐름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심장에 손을 얹고 0.1의 리듬에 맞춰 호흡한다. 내일의 풍요는 오늘의 평온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시작점에는 언제나 0.1이라는 작지만 위대한 숫자가 있다.


 
뮤지컬 The mission-K

지난 주말, 아내와 뮤지컬 한 편을 보았다. 제목은 <더 미션 : K>.
140년 전, 이 땅에 젊은 인생을 걸었던 네 외국 청년의 이야기다. 알렌, 언더우드, 에비슨, 그리고 세브란스. 그들은 이름도 낯선 조선이라는 나라의 새벽을 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태웠다.
1884년, 알렌이 조선 땅을 밟았다. 그해 갑신정변의 불길 속에서 칼을 맞고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살려낸 이가 바로 알렌이었다.고종이 소원을 묻자 그는 서슴없이 '병원'을 말했다. 그렇게 세워진 제중원이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의 뿌리가 되었다.뮤지컬을 보며 비로소 알았다. 우리나라 의사 면허 1호부터 7호까지가 모두 세브란스 의전 출신이었다는 것을.
나의 선배들이라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뻐근할 정도로 뿌듯했다.그러나 그 뿌듯함 뒤에는 서글픈 사명감이 뒤따랐다. 선배들은 의사이기 전에 지독한 애국자였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의 가시밭길을 걷다 독살되거나 감옥에서 순직했다.
그들의 헌신을 생각하니 문득 나의 젊은 날들이 겹쳐졌다.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네팔과 필리핀, 몽골과 레바논의 척박한 땅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시간들. 그네들이 조선에 심었던 사랑의 씨앗이 나를 통해 먼 이국땅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전율이 일었다.
공연 중 한 구절이 귓가에 남는다."We are the light. We are the ways."
그들만이 길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길이다.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원조를 하는 선진국으로 탈바꿈하기까지, 우리 모두의 땀과 눈물이 이 거대한 길을 닦아왔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문화생활에 아내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내용은 조금 낯설어했지만, 무대 위 꼬마들부터 성인 배우들까지 쏟아내는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아내의 박수 소리가 진료실의 웃음소리처럼 경쾌했다.
무대 위 아이들의 춤사위에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선배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환자들에게 말한다."그냥, 재미있게 사세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빛입니다." 좋은 오늘이 모여 위대한 길을 만든다.
나의 선배들이 그러했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 더 좋은 내일로 가는 길이 되고 싶다.

 
소유를 비워 존재를 채운 친구, 김종기를 보며

지난 토요일, 주말판 기사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친구 김종기다. 신문 지면 속 그의 미소는 여전히 맑았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세월의 무게를 나는 안다. 1995년, 그는 꽃 같던 아들을 학원폭력으로 잃었다. 부모에게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보다 더한 형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는 그 지독한 슬픔에 침잠하는 대신, 아들의 죽음을 세상의 빛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청소년 폭력예방재단'이다.

그의 헌신은 국경을 넘었다. 2018년 인촌상에 이어 2019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거머쥐었다. 시상식 날, 무려 47명의 지인이 자비를 들여 필리핀까지 동행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주최 측조차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단다. 한 사람의 진심이 얼마나 많은 마음을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몇 년 전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는 또 다른 감동이 찾아왔다. 방송 후 전국에서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는데, 그중 한 명은 금 100돈을 들고 그를 찾아왔다. 평생 고아로 자라 가족의 온기를 몰랐던 그 후원자는 종기에게 '형님'이라는 한마디를 건넸다. 그 짧은 단어가 종기의 가슴을 얼마나 울컥이게 했을까. 존재와 존재가 맞닿는 순간의 파동이 전해지는 듯했다.

최근 그는 시가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건물을 재단에 기부했다. 그 결단 앞에서 그는 딸에게 가장 미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딸의 대답은 아버지보다 더 깊고 단단했다. "아빠, 난 괜찮아. 죽은 대현이도 기뻐할 거야."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피는 속일 수 없고, 고귀한 정신은 대를 이어 흐른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친구를 보며 소명감이라는 단어를 다시 새긴다. 그는 이미 '소유'를 넘어 '존재'의 삶을 사는 대인의 경지에 올랐다. 반면 나는 여전히 무엇을 더 가질까 고민하는 소유의 삶에 머물러 있다. 신문을 덮으며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나도 이제는 친구처럼 마음을 비워내고 싶다. 쥐고 있는 손을 펴서 더 큰 세상을 품고 싶다. 내일의 내가 오늘보다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그리하여 언젠가는 나도 의미 있는 곳에 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마음을 채우는 솜, 사랑이라는 만찬

#저녁 식기가 마르기도 전이다. 아내가 식탁 앞에 앉았다. 손에는 가위와 천 뭉치가 들려 있다. 무엇을 하느냐 물으니 웃는다. 패브릭 하트를 만든다고 한다.
얼마 전 쿠팡에서 주문한 솜이 떠올랐다. 거실 한구석을 차지한 커다란 덩어리. 부피는 태산 같아도 값은 저렴했다. 그 가벼운 것들이 아내의 손끝에서 묵직한 진심으로 변하는 중이다.

아내는 정성껏 천을 오린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한다. 그 좁은 틈 사이로 솜을 밀어 넣는다. 납작했던 천이 금세 빵빵해진다. 제법 통통하고 귀여운 하트가 완성된다.꽤 고된 노동이다. 손가락 끝이 저릴 법도 하다. 하지만 아내는 말한다. "줄 사람들을 생각하면 하나도 안 힘들어. 정말 기뻐." 그 목소리에 설탕 같은 달콤함이 묻어난다.

#아내는 예전에도 그림을 그렸다. 손바닥만 한 액자에 구름을 그렸다. 세세한 붓 터치마다 다정한 바람이 일었다. 그림을 받은 이들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사랑의 본질은 결국 '주는 것(Giving)'이다. 아내는 구름을 그리고 하트를 꿰매며 행복을 전사(Transfer)한다. 관념적인 사랑을 손에 잡히는 물성으로 바꾸는 성실한 실천가다.
나의 핵심 가치 또한 '주는 것'과 '기쁨'이다. 하지만 실천은 늘 말보다 무겁다. 식탁 저편에서 하트를 빚는 아내를 보며 반성한다. 그녀는 이미 사랑의 조리법을 완성했다. 나는 아내한테 말했다." 당신이 채워 놓은 것은 솜이 아니라 사랑이었네. 곁에서 지켜보는 나까지 마음이 빵빵해지네...ㅎㅎ"
나도 분발해야겠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어도 좋다. 아내의 하트 속에 들어간 그 가벼운 솜처럼, 나도 가벼운 말 한마디부터 채워 넣으려 한다.

-더 많이 칭찬할 것.
-더 자주 웃음을 줄 것.
-상대의 마음을 빵빵하게 채워줄 것.
오늘 밤, 우리 집 식탁 위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의 만찬'이 차려지고 있다.

 
<흑백요리사 2>

지난 1월 13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2>의 막이 내렸습니다. 우승자는 백수저 최강록. 그는 기세등등했던 흑수저 '요리괴물' 이하성을 꺾고 3억 원의 상금을 거머쥐었습니다. 단순히 돈의 액수보다 무거운 것은, 그가 보여준 요리사의 '등 뒤'였습니다.

결승전이라는 극도의 압박 속에서 그는 화려한 기교를 과감히 덜어냈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깨를 볶고 갈아 두부를 빚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게을러지지 않겠다는 자기 점검의 의미"라고 그는 나직이 말했습니다. 남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소스에 매달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을 택한 셈입니다. 사실 요리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시간도, 경쟁자도 아닌 '이 정도면 됐다'는 나태입니다. 팔을 멈추지 않고 젓고 또 젓는 그 정직한 노동이야말로 최강록이 세상에 던진 출사표였습니다.
#우승 소감은 그의 요리만큼이나 담백하고 깊었습니다. "결승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면 요리괴물님이 훨씬 더 멋진 음식을 냈을 겁니다. 저는 그저 전국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리사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앞세우는 그 태도에서, 우리는 잘 익은 장맛 같은 인격의 성숙함을 봅니다. 이기고도 지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 그것이 진짜 고수의 품격입니다.
그는 일찍이 그의 저서 <요리를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중요한 것은 먹는 사람을 향한 다정한 마음이다." 결국 요리의 끝은 혀끝이 아니라 마음(心)에 닿아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비단 요리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업(業)이나 투자 역시, 그 본질의 뿌리는 결국 상대를 향한 진심에 닿아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그의 굽은 뒷모습을 보며 저도 거울 앞에 섭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의업(醫業)의 본질은 결국 환자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저는 차가운 청진기 대신 뜨거운 주방의 열기 속에서 다시 배웁니다. 때로는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이 수백 권의 의학 서적보다 더 날카로운 화두를 제 삶에 던지곤 합니다. 제가 드라마를 놓지 못하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결승전이라는 극도의 압박 속에서 그는 화려한 기교를 과감히 덜어냈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깨를 볶고 갈아 두부를 빚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게을러지지 않겠다는 자기 점검의 의미"라고 그는 나직이 말했습니다. 남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소스에 매달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을 택한 셈입니다. 사실 요리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시간도, 경쟁자도 아닌 '이 정도면 됐다'는 나태입니다. 팔을 멈추지 않고 젓고 또 젓는 그 정직한 노동이야말로 최강록이 세상에 던진 출사표였습니다.
#우승 소감은 그의 요리만큼이나 담백하고 깊었습니다. "결승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면 요리괴물님이 훨씬 더 멋진 음식을 냈을 겁니다. 저는 그저 전국에서 묵묵히 일하는 요리사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앞세우는 그 태도에서, 우리는 잘 익은 장맛 같은 인격의 성숙함을 봅니다. 이기고도 지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 그것이 진짜 고수의 품격입니다.
그는 일찍이 그의 저서 <요리를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중요한 것은 먹는 사람을 향한 다정한 마음이다." 결국 요리의 끝은 혀끝이 아니라 마음(心)에 닿아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비단 요리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업(業)이나 투자 역시, 그 본질의 뿌리는 결국 상대를 향한 진심에 닿아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그의 굽은 뒷모습을 보며 저도 거울 앞에 섭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의업(醫業)의 본질은 결국 환자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저는 차가운 청진기 대신 뜨거운 주방의 열기 속에서 다시 배웁니다. 때로는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이 수백 권의 의학 서적보다 더 날카로운 화두를 제 삶에 던지곤 합니다. 제가 드라마를 놓지 못하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웃음과 눈물

#토요일 조간 신문 한구석에 스페인 론다(Ronda)의 여행 기사가 실렸다. 론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투우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기사를 보자마자 2012년 11월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때 친구 부부들과 함께 그 붉은 흙 위에 서 있었다.
그날의 하늘은 눈이 부시다 못해 시렸다. 단순히 파랗다는 말로는 그 깊이를 담을 수 없었다. 잘 닦인 청사기 그릇처럼 매끄럽고, 차갑고, 단단했다. 손 끝을 대면 쨍하고 깨질 것 같은 그 맑은 고요함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의 가이드는 천생 재간꾼이었다. 그의 입술 끝에서 스페인의 뜨거운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소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그의 손짓에 투우장의 팽팽한 에너지가 되살아났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은 고압의 긴장감이었다.
성난 소가 거친 숨을 내뱉는다.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김이 대기를 갈랐다. 씩씩거리는 그 소리는 성난 증기기관차처럼 우리에게까지 육중하게 전달되었다. 앞다리가 마른 땅을 훑을 때마다 붉은 흙더미가 뒤로 튀어 올랐다. 바닥을 긁어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은 생을 건 마지막 경고였다.
돌격 직전,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온다. 소의 머리는 낮게 가라앉고, 목덜미의 근육은 험준한 산맥처럼 솟구쳤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투우사의 붉은 천, '무레타'를 향해 자신의 온 생을 내던지는 일뿐이다. 가이드의 이 리얼한 묘사에 우리는 배꼽이 공중제비를 돌 정도로 크게 웃었다. 론다의 햇살 아래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다.
하지만 사진 속 일행 중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여전히 환하게,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웃고 있다. 그리움은 늘 소금기처럼 짜고, 시리게 찾아온다. 보고 싶다는 말은 목구멍의 턱에 걸려 자꾸만 안으로 삼켜졌다.
그때 그 시절의 우리는 참으로 다정했다. 함께 나누던 공기는 화덕에서 막 꺼낸 빵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던 그 밤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그날의 풍경은 론다의 하늘보다 더 선명한 색채로 가슴에 남았다.
웃음으로 시작해 눈물로 끝맺는 기억이지만, 그 기억이 있어 나의 오늘은 여전히 따뜻하다

 
이재

그저께, 이재의 수상 소식을 들었다. 가슴 한구석이 뻐근했다.그는 열두 살에 SM 연습생이 됐다. 십 년 넘게 매일 노래하고 춤췄다. 하지만 세상의 시계는 그와 맞지 않았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트렌드가 아니라는 이유로 데뷔는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방출.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자책이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흉터를 남겼다.

실패는 그를 작곡가로 돌려세웠다. 뉴욕대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비트를 쪼갰다. 그러다 운명처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만났다. 한국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에 그는 다시 심장을 태웠다.

그가 빚어낸 노래 '골든(Golden)'은 전 세계를 홀렸다. 빌보드 1위 자리를 여덟 주나 지켰다. 정상을 확인한 순간,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너무 잘했어, 정말 잘했어."그 문장을 읽는데 목이 메었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속삭였다. "유능화, 너도 잘해왔고 충분히 잘하고 있어."

골든 글로브 수상식에서 트로피를 든 이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닫힌 모든 분께 이 상을 바칩니다. 거절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회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입바른 소리가 아니다. 십 년의 오욕과 좌절을 씹어 삼킨 자만이 낼 수 있는, 진한 육수 같은 진심이다. 역경을 견디고 승리의 정점에서 웃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달다.

세상의 모든 문이 닫힌 것 같아 막막한 이들에게, 이재의 '골든'이 찬란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 제2, 제3의 이재가 나타나 저마다의 정점에서 환하게 웃는 날을 꿈꿔본다.

좋은 오늘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좋은 내일로 가고 있다.

 
## **밍크담요**

#1979년, 어깨에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1년 뒤, 소령으로 진급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소령이라는 직함 덕분에 장교 아파트 입주권이 손에 들어왔다. 이름만 아파트였지, 실상은 방 두 칸짜리 비좁은 연탄 아파트였다.

겨울은 유독 길고 매서웠다. 새벽마다 연탄불을 갈기 위해 잠을 설쳤다. 다 타버린 연탄은 아래 칸 연탄과 자석처럼 쩍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집게를 쥐고 낑낑대며 씨름하다 보면 손목이 시큰거렸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났다. 잠결에 아들 녀석의 숨소리가 이상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하얗게 질린 아이를 들쳐 업고 영하의 공기를 가르며 응급실로 내달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그 차가운 밤의 공기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 서슬 퍼런 추위로부터 우리 식구들을 지켜준 건 소위 '밍크담요'였다.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가짜 밍크였지만, 감촉만큼은 일품이었다. 살에 닿는 느낌이 포근하고 몽글몽글했다. 문제는 무늬였다. 커다란 호랑이가 포효하거나, 핏빛보다 붉은 장미꽃이 담요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세련된 것을 좋아하던 아내는 그 요란한 색감을 볼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결국 전역과 동시에 그 담요는 우리 집에서 '퇴출 1호'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신문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 집에서 쫓겨났던 그 밍크담요가 지금 동남아시아에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단다. 이른바 'K-이불'의 화려한 귀환이다.

촘촘한 극세사 기술이 체온을 꽉 잡아준다. 한번 덮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이라 불릴 정도다.우리 눈엔 촌스러웠던 원색의 꽃무늬가 그들에겐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예술로 읽힌다.일본에서는 '이부루(イブル)'라는 고유명사로 통한다. 현지에서 비슷한 품질을 찾으려면 3배 이상의 가격을 지불해야 하니, 가성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사를 읽으며 낡은 밍크담요의 촉감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때는 배가 좀 고팠다. 연탄가스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내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희망, 그 하나로 좁은 방 안에서 온 가족이 엉겨 붙어 잠을 청했다.  촌스러운 꽃무늬 담요 한 장에 발을 밀어 넣고 낄낄대던 군의관 시절. 걱정은 얇고 희망은 두터웠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는 구하고 싶어도 보기 힘든 그 요란한 담요 속에, 사실은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청춘의 온기가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 미소라는 이름의 처방전

진료실의 공기는 늘 팽팽하다.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 환자의 피부에 닿을 때, 그 무게는 질병과 불안으로 더욱 무거워진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늘 먼저 미소를 건넨다. 입가의 근육을 살짝 올리는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공기 중의 결을 부드럽게 풀어낸다. 미소는 나의 첫 번째 진료 도구다.

최근 ‘하트미소 명상’을 익히고 있다.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탐구하는 카이스트의 이들까지 이 명상에 주목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방법은 간단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 온기를 가슴 한가운데로 천천히 내려보낸다. 따뜻한 파장이 심장을 훈훈하게 적시고, 손끝과 발끝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냉철한 두뇌도 결국 몸의 언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그 원리는 명료하다.' 움직임(Motion)이 감정(Emotion)을 만들고, 몸이 마음을 앞선다. '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행위 자체가 뇌에게 즐거움의 신호를 보낸다. 우리의 신경계는 생각보다 순진해서, 얼굴 근육의 미묘한 변화에도 기꺼이 반응하며 세로토닌을 내보낸다. 미소는, 그래서 의학적으로도 완벽한 자연치유의 열쇠다.

얼굴의 미소가 가슴의 미소로 깊어질 때, 변화는 더욱 선명해진다. 환자의 숨결이 가라앉고, 경직된 표정에 살짝 빛이 스민다. 수많은 증상과 검사 결과를 살피는 일상 속에서, 내가 발견한 가장 소중한 진리는 이것이다. 삶의 진정한 건강은 격정의 순간보다, 고요히 스며드는 평온에 기반한다는 사실.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온기를 품고 환자를 마주하는 것. 그것은 그 어떤 정교한 처방보다 확실한 치유의 시작이다. 미소는 나를 따뜻하게 데운 다음, 그 열기로 상대의 얼어붙은 불안을 서서히 녹여낸다. 이것이 내가 매일 나 자신과 모든 이에게 건네는, 가장 부드럽고 확실한 처방이다.

 
끊어지는 사회 , 이어지는 사회

신문의 사회면을 펼친다. "사람을 끊습니다." 날카로운 활자가 가슴을 찌른다.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30대, 타인이 공포가 된 50대의 이야기가 흑백 사진처럼 건조하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가 버겁다. 코로나가 남긴 '거리두기'는 방역의 수단이 아니라 마음의 습관이 됐다. 전문가들은 이를 '주변인 거리두기'라 부른다. 세련된 용어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외로움의 냄새가 난다.

세상은 그렇게 차가워지는데, 내가 머무는 온수동은 시계가 거꾸로 흐른다. 매주 목요일 점심. 약속이라도 한 듯 10여 명의 사내들이 모인다. 지독했던 코로나 시절에도 우리는 이 시간을 거르지 않았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건 혼자 먹는 밥이었기 때문이다.

점심 한 그릇 비우고 커피 잔을 부딪친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당구장으로 향한다. 초록색 테이블 위에서 공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여섯 시가 넘으면 배가 출출해진다. 다시 단골 식당에 앉아 요기를 채운다. 누군가는 집으로 가고, 누군가는 다시 당구 큐를 잡는다. 예전에는 자정이 넘도록 그 짓을 했다.

요즘 세상은 SNS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화면 속의 글자는 화려하지만, 등 뒤로 밀려오는 외로움은 더 깊고 짙다. 디지털의 그림자다. 하지만 우리 온수동 친구들은 아날로그를 산다. 만나서 살을 부딪치고, 침 튀기며 웃고,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우리는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인생의 황혼이라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시끌벅적한 정오다.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딱 하나. 앞으로 10년만 더, 이토록 재미있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 웃으며 보내는 것이다.

사람을 끊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잇는다. 그것이 우리가 내일을 기대하는 유일한 이유다.
 
사케

#일본 시코쿠 고치현의 낡은 어촌 마을. 바다 냄새가 잦아드는 골목 끝에 230년 된 목조 건물이 서 있다. 대형 메이커들이 공장제 술로 시장을 쓸어 담을 때, 니시오카 주조는 조상들의 손때 묻은 도구를 닦는다. 지역의 혼을 병에 담는 일은 속도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다.
좋은 술의 시작은 역설적이게도 ‘버리는 것’에 있다. 쌀알의 겉면을 50% 넘게 깎아낸다. 잡미를 쳐내고 남은 새하얀 심장, 거기서 ‘다이긴조’라는 향긋한 기적이 피어난다. 쌀을 씻고 찌는 과정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고된 노동이다. 하지만 그 손끝의 온기가 빠지면 술은 이내 차갑게 식어버린다. 정성이 없으면 술은 맛을 내주지 않는다.
#누룩균이 숨 쉬는 온도는 36도에서 39도 사이. 얇은 천을 겹겹이 덮어 온기를 지키는 것은 이 집의 서슬 퍼런 철칙이다. 20년 전부터 직접 배양해온 효모는 니시오카만의 향을 만드는 비밀 설계도, 즉 핵심 알고리즘이다. 공장장은 석 달 내내 두 시간마다 알람을 맞춘다. 술이 익어가는 미세한 기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밤을 지새우는 것, 그것이 장인의 물리적 헌신이다.
9대 사장 타다오미가 묵직한 전통의 기둥을 세우면, 아들 다이스케는 그 위에 젊은 감각의 지붕을 올린다. 근대화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가 이 술을 들이키며 일본의 내일을 설계했다는 전설은 여전히 술잔 속에서 일렁인다. 전국 신주 평평회 금상이라는 훈장보다 귀한 건, 과거와 현재가 이 한 잔에서 가장 맛나게 버무려진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시간의 켜가 쌓인 공간이다.
#새 술을 빚을 때마다 처마 밑에 푸른 삼나무 구슬 ‘스기타마’를 새로 건다. 초록빛 구슬이 갈색으로 익어갈 때 술도 함께 여문다. 세상의 입맛은 유행 따라 춤을 춰도, “좋은 술을 빚겠다”는 본질만큼은 쌀알처럼 단단해서 도무지 깎이지 않는다. 230년의 인내는 그렇게 다시 100년 뒤의 내일을 마중 나갈 준비를 마쳤다.

 
단골식당

#삼십 년 세월이 눅진하게 고인 지하 식당은 지상과는 다른 밀도의 공기가 흘렀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지상의 소음은 여과되고, 그 빈자리를 멸치 육수의 깊은 감칠맛과 갓 볶아낸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층층이 메웠다. 일주일에 세 번, 나는 의례처럼 그 어스름한 계단을 밟았다. 식탁 앞에 앉기가 무섭게 여사장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큼지막한 양푼을 내밀었다. 그곳은 물가 상승이라는 세상의 풍파를 비껴간 채, 칠천 원이라는 숫자가 도리어 미안해지는 성지였다.

이 집의 명물은 단연 제육볶음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빤한 학생들에게 그 붉은 고기는 단순한 반찬을 넘어 하루를 버티게 하는 생존의 연료였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고기 너머, 정갈하게 놓인 나물 바구니로 향하곤 했다. 사장님이 새벽부터 손수 다듬고 무친 고사리, 도라지, 취나물들. 그 산의 정취를 한데 모아 비빔밥을 슥슥 비빌 때면, 그것은 식사를 넘어 대지의 기운을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경건한 의식이 되었다.

#사장님은 내 비빔밥 위로 늘 계란 프라이 하나를 '툭' 하고 무심하게 얹어주었다. 뒤이어 낡은 병에 담긴 참기름을 아낌없이 둘렀다. "많이 드세요." 그 투박한 한마디는 길게 뽑히는 참기름 향을 타고 식탁 위로 타령 소리처럼 번졌다.  나의 단골 식당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 사장님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더는 솥을 잡을 수 없다는 소식은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막막하게 찾아왔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음식은 많지만, 그 시절 참기름 한 방울에 담겨 있던 지독한 진심을 파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칠천 원으로 내가 샀던 것은 한 끼의 물리적 배부름이 아니라,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이었음을 셔터의 먼지를 보며 깨닫는다.

#오늘도 나는 낯선 식당가를 헤매며 주인을 잃은 밥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사장님이 마지막까지 얹어주신 계란 프라이의 노란 온기는 내 혈관 어딘가에 녹아들어, 차가운 도시의 오후를 견디게 할 결연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내어준 뜨거운 응원. 그 미련하고도 숭고한 유산은 내가 다시 길을 잃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고소한 향을 피워 올리며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밥상을 먹고 자란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니까.
 
 외팔의 피아니스트가 건넨 위로: '노(No)'를 '예스(Yes)'로 바꾼 선율

#어느 정적 가득한 아침,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일간지 1면을 장식한 한 장의 사진이 내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었다. 오는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니컬러스 매카시(36)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는다. 사진 속 그의 표정은 건반 위를 유영하는 선율만큼이나 당당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억겁의 시간은 결코 평탄치 않았을 것이다.
매카시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이 없는 선천적 지체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남들과 다른 신체 조건은 어린 시절 그에게 침묵과 위축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음악은 운명처럼 예고 없이 그의 삶을 두드렸다. “열네 살 때 학교 강당에서 친구가 들려준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악보의 문법조차 모르던 소년은 그날 이후 피아노라는 거대한 산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과 부모님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꺾이지 않는 고집에 부모님은 결국 중저가 전자 키보드를 사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스승도 없이 홀로 건반 위의 지도를 그려나가며, 불가능해 보이던 독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지탱한 정신적 지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1887~1961)이었다. 파울은 『논리 철학 논고』를 쓴 세기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친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설파했던 철학자 동생처럼, 형 파울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는 비극을 겪은 후, 자신만의 '새로운 음악 세계'를 창조해낸 불굴의 인물이다.
매카시는 파울의 삶을 반추하며 이렇게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손이 없던 나보다, 건반을 누비던 오른손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의 상실감과 충격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딛고 무대로 복귀한 그의 의지력은 나를 일으세우는 가장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매카시는 세상이 던지는 ‘너는 할 수 없다’는 차가운 부정(No)을 오히려 삶을 전진시키는 뜨거운 연료로 삼았다. 이는 사지가 없이 태어나 전 세계에 희망의 복음을 전한 닉 부이치치의 삶과 궤를 같이한다. 장애는 그들에게 넘어야 할 벽이 아니라, 내면을 더욱 단단하고 견고하게 벼리는 신성한 담금질이었던 셈이다.
신문의 기사를 한 자 한 자 눈에 담으며, 나는 가만히 나의 왼쪽 팔과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불현듯 찾아온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나의 왼쪽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손끝에 닿는 감각은 마치 남의 살을 만지는 듯 무디기만 하다. 예전 같지 않은 몸 상태에 마음이 꺾이고 낙담할 때도 잦았지만, 매카시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뜻밖의 '다행스러움'과 '경외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오른쪽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비록 온전치 못할지언정 여전히 내 곁에 붙어있는 손발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 저미게 밀려왔다. 매카시가 오직 왼손 하나로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내듯, 나 또한 조금은 불편하고 느린 이 몸으로 나만의 인생 교향곡을 중단 없이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생겼다.
#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더 깊고 낮은 자세로 감사하며 보내려 한다. 내 왼쪽 몸이 느끼는 이 묵직한 무게감은 역설적으로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며, 이 무딘 감각조차 세상을 더 세밀하고 겸허하게 응시하라는 신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니컬러스 매카시, 그가 건반 위에 뿌릴 뜨거운 열정의 선율이 벌써부터 나의 귓가를 넘어 굳어있던 마음의 근육까지 따스하게 녹여주는 듯하다.
 
래리 앨리슨(Larry Ellison)

지난 12월 10일 오라클이 AI투자에 120억달러를투자한다고 발표한 날 주가는 11% 급락했다. 하루만에 250억달러(한화 35조 7천억원)이 증발했다. 그래도 눈하나 깜짝 안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오라클의 CEO 래리 앨리슨(Larry Ellison)이다.

그는 2살 때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충격은 그를 '규칙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로 만들었다. 대학을 두 번 중퇴한 후, 캘리포니아로 건너간 그는 CIA 프로젝트의 코드명이었던 '오라클'에서 영감을 받아 회사를 설립했다 .
앨리슨은 프로그래밍 천재인 밥 마이너와 함께 IBM이 잠재력을 보지 못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기술을 상용화했다. 이 기술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검색할 수 있게 하여 현대 데이터 관리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경쟁 철학은 1970년대 일본 사업가에게 배운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습다."경쟁자는 우리 아이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존재"라는 인식 아래, 앨리슨은 '시장 점유율 100% 미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목표를 세웠고, "나와 경쟁하고 싶다면 철저히 박살 날 각오를 하라"는 무자비한 '오라클 웨이'를 구축했다

공격적인 영업 관행과 제품 결함(오라클 버전 6)으로 1990년대 초 회사는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으다.뛰어난 후속 제품(오라클 7)으로 극적으로 회생했다 . 회사가 안정된 후 그의 시선은 빌 게이츠에게로 향했다. 그는 부와 명예에서 1위가 아니라는 사실에 집착하며 게이츠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사립 탐정까지 고용했다., 빌 게이츠의 PC에 대항하기 위해 네트워크 컴퓨터(NC)를 출시했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으로 실패했다

데이터베이스 시장 1위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애플리케이션 시장에서도 1위가 되기 위해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시작했다 . 5년 동안 약 305억 달러를 들여 피플소프트(PeopleSoft) 적대적 인수 등 52개의 회사를 삼키며 기술 업계 M&A 트렌드를 선도했습니다 .

현재 80세의 나이에도 그는 35조 원의 주가를 날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수 백조 원 규모의 AI 프로젝트에 뛰어들고 있다 . 앨리슨은 여전히 이기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며, 그의 이야기는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우리네들에게 도전과 감동을 주고 있다. 엘리슨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아키아나 크레머릭

지난 11월에 관람했던 아키아나 크레머릭(Akiane Kramarik)의 전시는 단순한 감상을 넘어 잊을 수 없는 종교적, 예술적 경험으로 남아있다. 이 전시회가 서울 '사랑의 교회 갤러리'라는 비전통적인 장소에서 열렸다는 점은, 그녀의 작품이 가진 영적인 메시지와 더욱 깊은 연관성을 느끼게 했다.


아키아나 크레머릭은 단순한 영재가 아니다. 그녀는 시각 예술 영재이자 동시에 시(詩) 분야까지 천재성을 인정받은 **'이진 천재(binary genius)'**라는 놀라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배경은 그녀가 무신론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정규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녀가 불과 4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7살에 시를 독학으로 창작했다는 것은 인간의 창조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녀의 창조적 영감은 일반적인 예술가의 그것과는 다르다. 아키아나는 자신의 작품 활동이 환상(Vision)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결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자신이 머릿속에 투영된 비전을 세상에 충실히 재현하는 단순한 '화가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배우지 않고도 구현해내는 경이롭도록 섬세한 극사실주의(Hyperrealism) 기법이야말로 그녀 작품의 기술적인 압도감을 형성한다.

그녀의 수많은 작품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은 8살에 완성한 대표작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다. 이 예수 초상화는 그녀가 환상에서 본 얼굴을 80시간 이상 공들여 그린 것으로, 출품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하늘과 땅,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잇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아키아나의 'Akianism' 스타일은 극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등이 융합된 독창적인 영역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녀의 작품은 기술적 완성도와 더불어 신비로운 영성 덕분에 보는 이에게 궁금함이 없는 명쾌함을 선사한다. 그녀는 작품 수익을 통해 전 세계 자선 활동을 지원하며 선한 영향을 이어가는 중이다. 어린 시절의 천재성을 나이가 들어도 꾸준히 유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공주여행 이야기

공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벌써 8년 전, 셋이서 떠났던 전남 곡성 1박 2일 나들이가 맺어준 인연. 그 깊은 날의 기억이 우리를 다시 불러 모았다. 이번 목적지는 백제의 고도, 공주다.
아침 8시 5분, 서울에서 공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11월 13일, 이날의 공기는 맑고 청명했다. 버스가 공주에 닿자마자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마곡사다.
# 천년의 가을, 마곡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마곡사. 도착하니 가을이 절정이었다. 산 전체가 붉고 노란 단풍으로 물들어 마치 거대한 비단 같다. 절 입구, ‘마곡사’라고 뚜렷하게 새긴 웅장한 바위는 오랜 세월 절을 지킨 듯 굳건했다. 그 바위가 절의 깊이와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경내로 들어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마곡사 5층 석탑이다. 국보로 지정된 이 탑은 특이하게도 꼭대기가 라마불교 양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와 티베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탑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먼 옛날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나태주의 시심(詩心)을 품고
마곡사의 고즈넉한 아름다움 속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음은 나태주 풀잎 문학관으로 향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국민 시인 나태주의 시, **‘풀꽃’**이다. 새삼스럽다. 이 단순하고 짧은 문장이 지닌 울림이 어찌나 큰지.
문학관 내부는 그야말로 ‘풀꽃’ 천지였다. 벽면부터 작은 기념품까지, 온통 이 시로 도배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좋은 글은 수식이 없다더니, 이 세 줄의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가장 단순한 단어로 가장 깊은 진심을 전달하는 힘.
#백제의 역사 속으로
시인의 감성을 뒤로하고, 우리는 역사유적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공산성에 올라 가을 공주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이어 백제 전성기의 위대함을 간직한 무령왕릉을 구경했다.
무령왕릉의 가장 특이한 점은 내부가 벽돌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중국 남북조시대의 양(梁)나라와 활발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벽돌 한 장 한 장에 새겨진 교류의 흔적을 따라갔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鎭墓獸)**도 인상적이었다. 늠름하면서도 해학적인 모습에서 백제인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백제 시대의 정교한 도자기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우리의 백제 문화 탐방은 마무리되었다.
8년 전 인연의 씨앗이 오늘 공주에서 꽃을 피웠다. 좋은 글은 수식이 없듯이, 좋은 인연 역시 꾸밈이 없다. 우리는 다시 만날 다음 해의 가을을 기약하며, 단순하고 맑은 웃음 속에 공주를 떠났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12년 수필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