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순 칼럼


출처 : 자유칼럼(https://www.freecolumn.co.kr)

 

 
 
 
 
 
 
 
 
 
 
 
 
 
 
 
 
 
 
 
 
 
 
 
 
 
 
 
 
 
 
 
 
 
 

권력 앞에 무릎 꿇은 정의

2025년 7월 9일

 

왜적의 발굽 아래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된 임진왜란이 끝나고 5년 후의 일입니다. 선조(宣祖) 36년 8월 22일 경기도 관찰사 강신(姜紳)이 급히 장계를 올렸습니다. 조상의 묘를 돌보러 말미를 얻어 포천에 와 있던 재신(宰臣) 유희서가 전날 밤 화적 30여 명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희서 (柳熙緖; 1559년~1603년)는 임란 당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군대와의 외교 사무를 담당하며 구국에 힘을 보탰던 인물입니다. 임란 후에는 병조정랑, 도승지를 거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습니다. 더구나 그의 부친 유전(柳㙉)이 선조 당대에 영의정을 지낸 명문이었습니다. 장계를 받은 선조도 재신의 변고에 그날 경연(經筵)을 쉬도록 하명했습니다.

해괴한 것은 유희서를 죽인 화적 떼가 물건은 전혀 훔쳐 가지 않고 말과 옷가지만 가지고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줄을 이어 더욱 해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포도청이 수소문해 잡아들인 적도들로부터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건만 이들이 제대로 심문받기도 전에 하나둘 옥 속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건은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사건의 시말을 캐던 유희서의 아들 유일(柳軼)이 사헌부에 올린 안타까운 호소가 저간의 사정을 말해줍니다. 

"부친의 살해를 주도한 자가 분명히 살해한 이유를 말했고,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털어놓은 자도 많은데 포도대장이 제때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또 도적의 괴수가 밝힌 도적 세 명을 붙잡았는데도 즉시 가두지 않고 심문을 지체했습니다. 그런데 수일 동안에 그 도적들이 잇달아 죽었으니 앞으로 어디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포도청이 우물쭈물 수사를 미룬 까닭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주모자가 바로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이었기 때문입니다. 유희서의 첩 애생(愛生)을 탐낸 임해군 이진(李珒)이 그녀와 몰래 간통하다 들킨 것입니다. 시비가 붙자 임해군은 가노(家奴)와 적도들을 시켜 유희서를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유일의 끈질긴 추적과 탐문으로 점차 사건 내막이 드러나며 다급해진 건 임해군이었습니다. 임해군은 선조 앞에 나아가 울며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유씨 집안에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종자(從者)들이 옥중에서 의문사한 적도의 시체를 메고 쳐들어가 유족들에게 시신을 먹으라 겁박하고, 고인의 모친인 정경부인 김씨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망동을 벌인 것입니다. 

마침 사헌부에서 조사받던 임해군의 노비 박삼석(朴三石)이 임해군과 애생이 간통하고 모의하여 유희서를 죽인 일을 모두 실토했습니다. 그러나 삼석은 막상 의금부에 끌려오자 모두가 강압에 의한 무복(誣服)이라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임해군의 노비와 적도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유희서의 아들 유일은 도적을 사주하여 임금의 큰아들을 제거하고 아비의 애첩(愛妾)을 도륙하려 하였으며,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은 도적을 추문(推問)할 때 유일이 끼어들어 불측한 말을 날조하게 하였으니, 모두 엄히 국문하여 정죄하라."고 명했습니다. 

유일은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려던 죄로, 변양걸은 적도들을 붙잡은 죄로 호된 심문을 받고 각각 곤장 1백대와 90대를 맞은 후 유배되었습니다.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 적당(賊黨)이 보호되고, 피해당한 유족과 수사하던 기관장이 도리어 죄를 뒤집어쓴 불의의 역사였습니다. 

영의정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유희서는 신의 외형제(外兄弟)입니다. 그 아들이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다 죄망(罪網)에 빠졌으나 신이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적을 잡은 대장 변양걸이 도리어 장을 맞고 유배된 일, 임해군이 김씨 부인을 욕보인 일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고 고하자 선조는 “양걸이 권세가를 두려워해 도적에게 거짓 자백케 하고, 왕자를 불측한 지경으로 얽어 넣은 것”이며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이덕형은 스스로 영상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172권, 선조 37년 3월 27일자에 당시 사관은 선조의 부당한 조처를 상술하고 이렇게 논설합니다. 

‘옛적부터 충성스러운 말을 하고 곧은 논의를 하는 선비는 대부분 거슬림을 받았지만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다. 왕자가 교만 방자하게 행동한 정상과 유일(柳軼)의 옥사를 번복한 원통함은 천변(天變)을 불러들이고, 국맥(國脈)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신(大臣)은 영합하느라, 대간(臺諫)은 구차하게 용납하며 바른말을 하지 못했다. 

임금이 흉금(胸襟)을 열어 가상히 받아들였더라면 천심(天心)을 돌리고 여론을 통쾌하게 하여 국가의 형세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임해군에 대한 임금의 자세는 아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방도가 아니었다. 어떻게 귀근(貴近)들의 방자함을 단속하고 흩어진 인심을 수습할 수 있겠는가. 

곧게 간하고 충성을 다한 신하를 배척하고, 언로(言路)를 막음으로써 국세(國勢)가 깎이게 하였으니 국가가 필경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오늘 임금의 비망기(備忘記)야말로 곧 나라를 망칠 분명한 증거라 여겨진다.’

수수께끼 같은 범죄와 사법처리의 정황이 아득히 400여 년 전에도 벌어졌었습니다. 그때도 정의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군주 앞에서 정의를 세워야 할 삼사(三司)는 고개도 바로 들지 못했습니다. 왜란을 자초하고 백성과 한양 도성을 버린 후 압록강까지 도주해 명나라 신하가 되겠다며 도강(渡江)을 고집하던 왕, 재신을 살해하고 능욕한 아들을 감싸느라 피해 유족들과 수사기관에 도리어 벌을 내린 구차한 왕, 그렇게 무능하고 아둔한 군주의 권력 앞에서 정의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정의를 논하며 바른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사관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땅에는 어떤 사관이 있어 무너진 정의를 고발할 수 있을까요?
 

 

1989년의 소련, 오늘의 대한민국

2025년 6월 11일

 

모스크바의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공항 밖으로 나서자 가랑비가 뿌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마중 나온 것일까. 우중충한 옷차림의 남녀들이 손에 꽃 한두 송이씩 들고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어떤 설렘이나 반가운 빛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안내원이 관광객에게 꽃을 팔려고 나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선 우산 하나가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안내원이 ‘마가진’으로 가 보자며 데려갔습니다. 무슨 잡지 파는 곳인가 했더니 물건 파는 가게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몇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지만 행인들의 반응엔 별로 달라지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양쪽 어깨에서 빗물이 흘러내려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더러는 우리가 가난하던 옛날 그랬던 것처럼 설탕부대 비슷한 자루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걸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우산을 들고 가는 사람도 보이긴 했습니다.

길거리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텅 빈 진열장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몇 사람이 웅기중기 모이면 혹시나 해서 일단 줄을 서고 본답니다. 

쨍하고 해가 뜬 날이었습니다. 호텔 프런트에서 미국 달러를 소련 루블로 바꾸어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혼자서 그 유명하다는 붉은 광장에 나가볼 생각이었습니다. 도로변에 늘어선 택시 하나를 집어 탔더니 운전기사가 먼저 달러를 갖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방금 루블로 바꿔 나왔다니까 달러가 아니면 태우지 않겠답니다. 기사가 혹시 미국 말보로 담배를 가졌느냐고 또 물었습니다. 마침 작은 가방에 비상용 담배 몇 갑을 갖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한 갑을 꺼내 내밀었더니 비로소 씨익 웃으며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미국 담배 두 갑으로 붉은 광장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호텔 문을 나설 때마다 미화를 루블로 바꿔 들고 나왔지만 루블을 받아주는 곳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며칠 애를 먹고 난 후에야 안내원에게서 사정 얘기를 들었습니다. 루블로는 살 수 있는 물건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두가 기피한다고. 대신 미국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외국인 전용 가게나 호텔에서 물건을 구할 수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저녁 무렵 외국인 전용 호텔의 바에 내려가면 멋지게 생긴 러시아 미녀들이 말없이 미소를 흘리며 테이블 사이를 지나다닙니다. 손님이 눈짓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합석해서 술잔을 받아 듭니다. 그리고 뜻(가격)이 맞으면 함께 일어납니다. 택시로 십여 분, 어떤 때는 몇십 분 거리의 아파트가 그들의 공공연한 사업장이랍니다. 겨우 미화 1백 달러, 때로는 더 싸게도 그들의 몸을 파는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서? 천만에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러시아의 ‘인터걸’은 한때 세계의 유행어가 되었었지요. 

호텔 방 안에서는 서울과의 통화가 불가능했습니다. 물어물어 전신전화국을 찾아갔더니 웬 장터처럼 북새통이었습니다. 아마도 밖으로 교신할 수 있는 곳이 거기뿐이어서 그런 듯했습니다. 접수대에서 서울로 국제통화를 신청하고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 못해 일부러 접수대 여직원에 시선을 던져보았습니다. 그녀는 돌부처같이 무심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가방 속 상비품 가운데 팬티스타킹 하나를 꺼내 여직원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서 제 서랍에 챙겨 넣었습니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여직원이 통화가 가능한 부스를 일러주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간단하면서도 긴한 업무는 대체로 그런 식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말보로 담배 빨간 딱지, 여자는 팬티 스타킹.” 서울을 떠나기 전 먼저 이곳을 다녀온 분들의 조언이 정말 기가 막힌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모스크바를 다녀온 지 2년 후인 1991년 12월 공산 종주국 소련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똑같이 일해서 똑같이 잘 먹고 잘살자!’ 그렇게 시작한 공산주의 실험은 백 년도 되기 전에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한 채 이념으로만 설계한 사회, 개개인의 창의와 노력에 보상이 없는 사회, 거기에는 결국 노동도 없고 생산도 없고 궁핍과 독재만 남을 뿐입니다. 동력을 잃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은 오직 감시의 눈과 독재자의 채찍일 뿐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때늦은 공산주의 실험을 시도하는 자들은 분명 사기꾼일 것입니다.


지난해 전남의 한 계 모임 회원들이 투숙한 펜션에 '공산당'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어 경찰이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장난삼아 넣었다"고 했고 경찰은 대공 용의점이 없었다며 조사를 종결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산당을 장난쯤으로 아는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인센티브(인간의 기초적 욕구와 희망)로 스스로 권면케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게 정치의 역할이요 목적이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라는 책에 그렇게 썼더군요. 이들은 또 "나라가 가난해지는 이유는 권력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실수와 무지 때문이 아니라 국민이 그들에게 매달리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빅3, 김연경... 영웅들의 퇴장

2025년 5월 13일

세월 앞에는 약이 없다고들 합니다. 아무리 강건하던 사람도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힘도 떨어지고 덩달아 의욕도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스포츠 세계에서는 나이를 거스를 방법이 없습니다. 


세계 남자 테니스 무대는 오랫동안 ‘빅3’로 불려온 슈퍼스타 셋이 지배해왔습니다. 페더러-나달-조코비치, 이들은 마치 탱크의 캐터필러를 돌리는 톱니처럼 20년 동안 릴레이하듯 호주-프랑스-영국-미국 오픈 등 4대 그랜드슬램 대회를 휩쓸어왔습니다.


21세의 신성으로 2003년 윔블던에서 처음 영국 오픈 정상에 오른 로저 페더러(스위스)는 2018년 호주 오픈까지 15년 동안 모두 20회의 그랜드슬램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뒤를 이어 2005년 롤랑가로스에서 19세에 처음 프랑스 오픈을 제패한 라파엘 나달(스페인)은 2022년 프랑스 오픈까지 17년 동안 22회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이들보다 조금 늦은 2008년 멜버른에서 21세에 처음 호주 오픈 정상에 오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는 2023년 미국 오픈까지 15년 동안 가장 많은 24회의 그랜드슬램 우승 기록을 쌓았습니다. 

2003년부터 20023년까지 20년간 빅3가 차지한 그랜드슬램 타이틀은 모두 66개, 전체 80개의 82.5%에 달합니다. 페더러는 특히 윔블던 잔디코트에서 가장 많은 8회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나달은 클레이코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흙신’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파리 롤랑가로스에는 14회 우승의 위업을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조코비치는 호주 10회 우승으로 하드코트에서 성적이 뛰어났습니다. 빅3의 개인 통산 타이틀 기록도 거의 전설입니다. 페더러 103회, 나달 92회, 조코비치 99회. 


(상) 페더러의 한 손 백핸드 스트로크;
(중) 롤랑가로스에 세워진 동상 옆에 선 나달;
(하) 조코비치의 수비 자세  
페더러는 한 손 백핸드의 고전적 스타일을 대표하는 선수였지요. 동영상에서 볼을 지우고 그의 몸놀림만 그려보면 마치 우아한 발레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반면 나달은 어김없는 전사의 모습입니다. 머리를 동여맨 밴드에서부터 근육질의 팔다리에 휘감아 치는 톱스핀은 코트 밖으로 멀리 날아갈 것 같던 볼조차 코트 안으로 욱여넣어 상대를 당혹케 합니다. 그에 비하면 조코비치의 테니스는 마치 자로 잰 듯 기계적입니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플레이, 그 위에 상대를 압박하는 심리 전술까지 펼쳐 승리를 쟁취하지요. 이처럼 대조적인 플레이스타일이 빅3의 대결을 지켜보는 팬들을 더욱 즐겁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슈퍼스타들의 멋진 경기는 더 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페더러는 2022년 41세에, 나달은 지난해 38세에 잇달아 은퇴를 선언했고, 유일하게 코트에 남은 조코비치(38)의 테니스도 이제 종착점에 다다른 느낌입니다. 완벽 플레이를 뒷받침해 온 에너지가 바닥에 이른 때문입니다. 

매년 차례로 열리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는 단 한 경기에서도 길면 5시간 이상 사투를 벌여야 하는 힘겨운 여정입니다. 그런 고개 7개를 넘어야 비로소 우승의 영예를 차지할 수 있지요. 특히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클레이코트인 롤랑가로스 센터코트에는 “VICTORY IS BELONG TO THE MOST TENACIOUS.”(승리는 가장 강인한 자의 몫이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습니다.

지난해는 21세의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가 프랑스와 영국 오픈, 23세의 야니크 시너(이탈리아)가 호주와 미국 오픈 타이틀을 석권, 신예들의 잔치 무대가 되었습니다. 조코비치는 미국 오픈 3회전에서 예상 밖으로 호주의 알렉세이 포피린에게 4-6, 4-6, 6-2, 4-6으로 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올해 3월 조코비치는 마이애미 오픈 결승에 진출, 대망의 개인 통산 100승 달성을 목전에 두었으나 또다시 19세의 신예 야쿠프 멘시크(체코)에게 6-7, 6-7로 무너졌습니다. 심기일전해 출전한 몬테카를로 마스터스에서는 더욱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회전에서 칠레의 알레한드로 타빌로에게 2-6, 3-6으로 완패, 탈락한 것입니다. 예전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코비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빅3’, 영웅의 시대는 저물고, 시너, 알카라스를 선두로 한 20대 초반의 신성들이 테니스의 새로운 신화를 엮어 가고 있습니다. 올드팬들에겐 빅3의 화려했던 플레이가 그만큼 더 그리워지겠지요. 

무려 20여 년 동안 한국 여자배구를 이끌어 온 슈퍼스타 김연경도 2024-2025시즌 V리그 우승을 끝으로 날개를 접었습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4위에 그쳤지만 금․은․동 메달 국가 주전들을 제치고 MVP로 뽑힐 만큼 출중한 기량을 인정받았던 세계적 스타였지요. 국내 프로무대는 물론 일본, 중국, 튀르키예 등 해외무대에서도 소속팀을 정상권으로 이끌며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었습니다. 2021년 코로나로 한 해 늦춰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도 기대 이상의 맹활약으로 우리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었고요. 


우승 메달에 키스하는 김연경
여자 선수 나이 37세로 풀세트를 감당키 쉽지 않았겠지만 올 시즌 김연경은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소속팀 흥국생명에 5번째, 최다 우승의 기쁨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젊은 후배, 외국인 선수 모두를 압도하는 활약으로 MVP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시즌 초반 하위그룹에서 출발해 V리그 결승 시리즈까지 진출한 정관장은 흥국생명에 먼저 두 경기를 내어주고도 2승2패로 끈질기게 따라붙었습니다. 마지막 5차전은 김연경과 메가와티(인도네시아), 양 팀 에이스의 맞대결 양상. 열전은 세트 스코어 3-2(최종 5세트 15-13), 흥국생명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선수로서 마지막 목표를 달성한 김연경은 환한 미소를 지었고, 준우승에 그친 메가와티는 아쉬움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결승 시리즈에서 흥국생명에 2승3패로 뒤져 준우승한 정관장이 펼쳐보인 플래카드
시상식에서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준우승팀이 펼쳐 보인 플래카드에는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김연경 선수의 앞날을 정관장이 응원합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제껏 그렇게 감동적인 우승 축하 문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정관장의 플래카드는 김연경에 대한 한국 배구계와 모든 팬들의 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배구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팬들을 불러 모아 배구 열기를 높여 온 공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올 시즌 김연경의 마지막 일정을 따라 경기장은 늘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배구팬들은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며 하트를 날렸습니다. 그녀만큼 팬들을 많이 모으고, 그녀만큼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본 선수도 없었을 겁니다. 팬들은 그녀의 억척스러운 승부 근성, 거친 감정표현조차도 사랑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일부 열혈팬들이 머리 위에 식빵 모양의 장식을 쓰게 된 내력을 듣고서는 배꼽을 잡았던 기억도 잊히지 않습니다.

“김연경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볼 수 있어 영광이다.” 한때 김연경과 함께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선배 한유미 방송 해설위원의 멘트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지난해부터 예고되어 온 은퇴지만 김연경이 사라진 코트에서 느낄 배구팬들의 상실감과 그리움은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우리 손잡고 걸을 수 있을까

2025년 4월 9일

 

봄볕이 따사로운 날이었습니다. 점심 모임이 끝난 후 혼자 을지로를 걸어보았습니다. 을지로 입구에는 예전 올망졸망하던 건물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하늘을 가릴 만큼 우뚝 솟은, 낯선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잠시 빌딩 정글의 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 많이도 변했구나, 하며 한참을 걸어 4가쯤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엔 아직도 이삼 층짜리 옛 건물들과 건축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데군데 얼마나 큰 건물을 세우려는지, 엄청난 넓이의 땅을 고르는 곳도 보였습니다. 거기도 어느 틈엔가 빌딩 숲으로 바뀌겠지요. 


그렇게 옛 기억과 눈앞의 변화를 어림하며 생각에 잠겼는데 마침 앞에서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인 둘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젊은 시절 거닐던 옛 거리의 추억을 더듬어보려고 나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옛날 스칸디나비아병원, 또는 메디칼센터라고 불리던 국립중앙의료원을 지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지하도를 찾아 내려가던 두 노인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 영 딴 세상이 된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어~ 조심해! 잘못 넘어지면 큰일 나요.”
“응, 고마워!”

둘의 화답에서 깊은 믿음과 고마움이 묻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진즉부터 손을 꼭 맞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손 잡아보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 공연히 속이 뭉클해졌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엔 친구들과 수원 화성 성벽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고교 동기 회장을 맡았던 친구의 제안으로 시작된 월례 걷기 모임입니다. 일찍부터 산을 좋아해 친구들을 산으로 이끌던 그는 동기 회장을 맡자마자 요란스레 호텔에서 열곤 했던 송년 잔치를 없애버렸습니다. 대신 매달 한 차례씩 걷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기대 이상의 호응으로 이곳저곳 지엽적으로 열리는 모임에 소홀하던 친구들까지 모여들어 매번 30, 40여 명씩 함께 걷곤 합니다. 청계천, 한강변, 창덕궁으로. 대구, 울산에서 일부러 시간 맞추어 올라오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살다가 모처럼 귀국한 기회에 걷기 모임에 참여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지난 2023년 10월에 처음 시작되었으니 벌써 열아홉 번째입니다. 

이따금 어린 시절 고교 3년, 길어 봐야 중고교 6년 투닥거리며 지낸 인연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수 있을까,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침 그 무렵엔 비틀스의 <그대의 손을 잡고 싶어(I Wanna Hold Your Hand)>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었지요.

“I Wanna Hold Your Hand 그대의 손을 잡고 싶어/ And when I touch you 당신의 손길이 스칠 때면/ I feel happy, inside 나는 가슴 뭉클한 행복을 느낀답니다.”

물론 비틀스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했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화성을 돌며 동대문에서 본 두 노인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손을 맞잡고 걸을 수 있을까. 나이가 더 들어 걸음걸이조차 부실해질 때 서로를 부축해 가며. '


“야들아, 우리 태안 가자!”
“갑자기 태안은 왜?”
“너희들 뉴스도 못 봤어? 온 국민이 태안에 기름 닦으러 간다는데.”

벌써 열여덟 해가 지났네요. 2007년 12월 한겨울에 유조선과 해상 크레인이 풍랑으로 충돌해 태안 앞바다와 해변이 온통 기름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안 생태계의 파괴는 물론 어업에 종사하는 지역민들에게는 엄청난 재해였습니다. 그때 전국에서 백만 명이 넘는 봉사자들이 달려가 해변의 기름 묻은 돌과 자갈을 닦아내며 방재활동에 참여했지요. 

친구의 선창으로 우리도 전세버스에 올라타 차가운 겨울바다를 찾았습니다. 위아래가 붙은 하얀 방재복을 덧입고 쭈그려 앉아 걸레질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른 새벽 버스를 놓칠까 봐 집어 탄 택시 기사가 추위에 고생한다며 털실 모자를 건네주던 기억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런 열성적 국민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 그렇게 깨어 있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 그렇게 착한 택시 기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모두가 행운이요 고마운 일입니다. 내게도 언제든 따뜻한 손을 내어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아, 권태훈 형!

2025년 3월 10일

망연자실(茫然自失)! 말 그대로입니다.


2025년 3월 7일 정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형은 스스로 몸을 불태웠습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모르는 국민의 몽매함을 일깨워야 한다며 죽음 앞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먼 이웃, 우리와는 전혀 다른 품성을 가진 이들의 과격한 행위로만 알고 있던 분신​(焚身)!

형의 의기와 용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 겨울 고작 독감, 장염 등 자잘한 불편에 투덜거리던 저 자신의 우둔함과 나약함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친구들 모임에 앞장서 큰 목소리로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해주던 형, 주변 큰 행사에 주저함이 없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던 형, 늘 한 잔만 더 하자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형, 언제나 호탕하고 쾌활하던 형...

자신을 불사르던 그 용기로 다시 벌떡 일어나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 주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언제부턴가 제 이익만을 구하는 자, 남을 시샘하는 자, 남을 속이는 자, 비겁한 자, 비굴한 자, 위선으로 낯을 가린 자, 이간질하는 자, 충동질하는 자, 배신자들이 들끓게 된 이 땅에 그 같은 의인이 꼭 필요함을 하느님도 모르실 리 없지 않겠습니까.

친구들은 물론 온 국민에게 형의 헌신이 헛되지 않은 의미로 남겨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형은 건장한 팔순 노인이기에 앞서 왕성하게 사업체를 이끌어가던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옛 스승을 잊지 않고 챙기던 예의 바른 제자였습니다. 친구들 발길을 교회의 복음 앞으로 이끌던 누구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심신에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유복했던 형.

형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오직 하나, 혼란과 갈등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이 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왜? 이만큼 먹고살게 된 나라, 그 위에다 문화의 꽃을 피워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지금과 같은 갈등이 빚어지는 것일까? 누군가의 시기, 질투, 음모가 아니라면 이 어진 백성들이 남을 인정하고 배려하기는커녕 이렇게 살기(殺氣)로 맞설 까닭이 없다. 모든 사건 사고를 정치화하려는 어두운 세력, 사회 정의의 보루가 아니라 국민 의혹의 핵심이 되어버린 법원, 정치 집단이 되어가는 종교 단체, 그 바람에 물결처럼 속절없이 출렁거리는 민심을 어찌할 것인가. 내 몸 하나 바쳐서 이 백성이 깨어날 수만 있다면... 

형은 그렇게 되뇌며 자신을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하느님이 계시하신, 나라를 살리고 자신도 영원히 사는 길이라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며 나라에 짙은 암운이 드리웠던 그때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다음처럼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는 아무 부럽고 아쉬울 게 없던 권문세가의 일원이었지요.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다.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에서 모두 죽어서 사라질 것이다. 대개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도리어 살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한다.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지하에서라도 여러분을 기어이 도울 것이다.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나 마음과 기운을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서로 돕고 힘을 모아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라. 그러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영결을 고하노라.”

'한마음으로 서로 돕고 힘을 모아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라.'

형의 마음이 민 충정공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가슴 깊이 새기며 무릎 꿇어 이 나라가 나아갈 바른길을 간구합니다.

 

기억과 망각 사이

2025년 3월 6일

팝송, 특히 칸초네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혹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도메니코 모두뇨'. 그럼 '미나 마찌니'도 아시겠지요. '안토넬라 루알디'도 아십니까? 뭐 대단한 상식 문제는 아니고, 순전히 제 머릿속 기억 장치의 알 수 없는 혼란에 대해 얘기해 보려는 겁니다.


연애 시절 마누라 손목 잡고 함께 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탈리아 영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원제는 'Appuntamento a Ischia' 이스키아섬의 약속)에 출연한 배우들인데 마누라는 배우 이름은커녕 그런 영화 본 적도 없답니다. 아예 어느 딴 여자와 봤을 거라며 눈총을 쏘니 기가 막힐 따름이지요. 하긴 뒤얽힌 제 기억 회로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는 딸 하나 딸린 홀아비 대중가수 도메니코 모두뇨(Domenico Modugno)가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데 어린 딸은 그 여인이 전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클래식 음악가의 약혼녀(?) 안토넬라 루알디(Antonella Lualdi)를 가로채 아빠와 맺어주려는 작전을 벌이지요. 스토리보다는 지중해와 이스키아섬의 아름다운 풍광, 파도를 타고 흐르는 듯한 미나 마찌니(Mina Mazzini)의 노래 '행복은 가득히'(원제는 'IL cello in una stanza', 방 안에도 하늘이)가 더 인상적이었던 영화입니다.


고향 폴리냐노 아 마레 해안에 세워진
'볼라레'의 가수 도메니코 모두뇨 동상
아무튼 무슨 까닭인지 그 영화 이전에도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본 적 없는 그들의 이름이 몇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한 겁니다. 도메니코 모두뇨는 이탈리아 서민들에게 큰 위로를 안긴 유명한 노래 ‘볼라레’(Volare, 날아보자)를 불러 산레모 가요제, 그래미상을 휩쓴 칸초네의 스타라네요. 고향 폴리냐노 아 마레에 그를 기리는 동상까지 세워졌다는 걸 훨씬 후에야 알게 됐습니다. 

하나 더, '클레이턴 무어'(Clayton Moore)라는 배우를 아십니까? 초딩 시절 부산극장에선가 본 영화 <론 레인저>(The Lone Ranger)의 주인공이랍니다. 당시엔 제목의 뜻조차 전혀 몰랐었지요. 어쨌든 사람보다 더 영리한 백마를 타고 혼자서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의로운 사나이였습니다. 그의 이름 역시 그때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지금껏 비좁은 머릿속에 버티고 있어 새로이 기억해야 할 것들을 가로막고 있네요.

국민학교 담임선생님 성함은 학년마다 생생히 기억하는데, 중고등학교 담임선생님 몇 분은 별명부터 먼저 떠오르고, 또 몇 분은 끝내 기억해 내지 못해 민망하고 죄송스럽습니다. 갈라파고스를 기억해 내려면 엉뚱하게도 파타고니아가 먼저 떠올라 애를 먹입니다. 거꾸로 파타고니아를 기억해 내려면 갈라파고스가 가로막아 한숨이 나옵니다. 번번이 까먹어 마누라에게 몇 번씩이나 되묻곤 하는 이름들도 있지요. 여뀌, 고들빼기, 쑥부쟁이, 자귀나무… 결국 휴대폰 메모장에다 적어 놓아야 했습니다. 

흔히들 인상 깊었던 일들이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별로 인상적일 것도 없고 전혀 기억할 필요도 없다 싶은 것들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대신 정말 꼭 기억해 내고 싶은 일들이 가물가물하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언젠가 자유칼럼에 ‘기억은 녹음테이프와 같아서 처음 새겨진 것이 오히려 또렷하고, 그 위에 덧칠된 나중 것이 지워지기 쉽다’는 억지 이론을 떠든 적이 있습니다. 선입선출(先入先出)도 아니고, 그 역순도 아닌 채 혼란에 빠진 지금은 스스로도 그게 엉터리 이론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 전 치매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검사 직원이 "만점은 받으셨는데 인지능력은 조금 떨어지신 것 같아요" 하더라구요. 아마 몇 가지 문제를 더듬거리며 맞혀서 그런가 봅니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 인지능력도 떨이지게 되겠지요. 그 상태가 더욱 악화되면…? 볼일 보고 바지 앞 지퍼를 안 올리면 건망증이고, 지퍼를 안 내리고 볼일 보면 치매라던데…! 해가 갈수록 머릿속 기능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아져 조마조마합니다.

어쨌거나 억울하고 섭섭했던 일, 부끄럽고 불쾌했던 일들은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기쁘고 즐거웠던 일, 자랑스럽고 유쾌했던 일들만 새록새록 떠오르도록 정돈하고 싶은데 기억과 망각의 회로가 뒤얽힌 탓인지 거꾸로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소란스러운 세상일도 언젠가는 먼 옛날의 일로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되겠지요. 어두운 일들은 가급적 빨리 망각 속으로 밀어내고, 즐거운 일들로만 기억의 창고를 가득 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vnrfVlR7Hs
영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에서 미나 마찌니의 노래 장면
 

 
 

미국 대통령, 한국 대통령

2025년 1월 3일

지난 1월 20일(미국 시간) 마침내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45대 대통령 4년 임기를 마치고 조 바이든에게 넘겼던 자리를 4년 만에 되찾은 것입니다. 야외무대에서 열리던 전례와는 달리 이번 취임식은 혹한을 피해 워싱턴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열렸습니다. 바로 4년 전 1월 6일 부정선거를 주장한 트럼프의 선동적 연설에 이어 그의 지지자들이 난입해 짓밟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취임식에는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조지 W 부시와 로라 부시,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과 질 바이든, 댄 퀘일, 마이크 펜스, 카멀라 해리스 등 공화·민주 양당 출신 전임 대통령과 부통령, 배우자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밉든 곱든 한자리에 모여 앉은 가운데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정권 교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이들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축도에 나선 흑인 목사가 미국의 온 땅에 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모두 한목소리로 국가를 부르고 경례를 보냈습니다.

기업가 출신 대통령답게 트럼프의 취임식에는 일론 머스크(테슬라),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팀 쿡(애플), 마크 저커버그(메타), 순다르 피차이(구글) 등 미국 산업을 이끄는 테크기업 대표들 얼굴도 많이 보였습니다. AI(인공지능) 패권에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트럼프의 사업가적 기질과 경제정책을 가늠케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취임식을 마치고 백악관 오벌오피스에 돌아오자마자 트럼프는 폭풍처럼 행정명령을 쏟아냈습니다. 이미 공언한 대로 1.6 의회 폭동에 연루된 1천6백 명 가까운 수감자, 피의자들을 거의 전원 사면하고 감형했습니다. 화석 연료 사용을 제한하는 파리 기후협약 탈퇴, 코로나 사태로 불신을 산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이민 규제를 위한 불법체류자 추방, 멕시코 국경 수비 강화, 원정 출산에 대한 출생시민권 제한, 전기차 보조금 중단, 수입 관세 부과… 그리고 자신의 범죄 혐의를 수사하던 특검 검사들을 해고해버렸습니다. 거침없는 그의 행정 조처는 앞으로 4년간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질서를 뒤흔들어 놓을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 복귀의 위험을 예고하는 더 타임스의 시사만평
더욱 놀랍고 주목할 만한 일은 트럼프 취임식 10일 전에 있었던 법원의 판결입니다. 트럼프는 2016년 포르노 배우와의 성관계 폭로를 막으려고 13만 달러를 건네고, 관련된 회사 회계기록을 조작한 중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뉴욕주 1심법원 맨해튼 형사법원의 후안 머천 판사는 이날 공판에서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대로 트럼프의 유죄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징벌 없는 ‘무조건 석방(unconditional discharge)’을 선고했습니다.

머천 판사는 “트럼프 당선자가 대통령으로서 받는 법적인 보호의 범위가 특별하다. 물론 그것이 배심원단의 평결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는 ‘무조건 석방’을 선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한 해결책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사법 정의는 구현하되 대통령 취임 예정자로서 트럼프의 직무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판결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동안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국회의 탄핵 소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영장 발부라는 해프닝이 이어졌습니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돌연한 비상계엄 선포와 4일 새벽의 해제가 이 해프닝의 시발이었지요. 여야 의원들의 합의로 국회가 윤 대통령을 ‘내란 수괴’라며 탄핵 소추한 가운데 검찰과 경찰이 내란 수사 경쟁을 벌였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해 대통령의 지휘 아래 있던 그들이 지금은 누구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 군대에서는 대통령의 계엄 명령도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전시 작전명령은 제대로 통할지 궁금해집니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공수처장의 청구로 서울서부지법 판사가 체포영장을, 이어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서 현직 대통령이 공관에서 끌려 나와 공수처에 체포되고, 구치소에 구금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누워서 침 뱉기!’ 국민의 잘못된 선택이 빚어낸 혼란이지만 바로 그 국민에게 가장 모욕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제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가 내란인지 아닌지 법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원 내부에서조차 내란에 대한 시비, 공수처의 수사 권한에 대한 의문, 대통령에 대한 체포·구속 영장 청구와 발부의 적법성을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문득 백악관의 현직 대통령도 수사 대상으로 체포되고, 구속될 수 있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나라, 저런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이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피와 눈물이 흐르는 땅, 팔레스타인

2023년 12월 13일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 우리는 울었습니다. 시온을 그리며.)

인기 그룹 보니 엠이 디스코풍으로 불러 인기를 모은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는 유대인들의 고달픈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대표적 노래입니다.

유대인들이 겪어 온 고난사는 성서와 역사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BC 13세기(혹은 15세기) 모세가 홍해의 기적을 일으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줄 때까지 그들은 400여 년간 이집트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의 영화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BC 8~BC 6세기에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멸망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또다시 노예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기원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길고 긴 유랑의 길에 나섰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 가운데는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도 남을 위인들이 무수합니다. 자유주의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 19세기 세상을 뒤엎은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1818~1883)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 명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1889~1974), 서정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현대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원자폭탄 개발로 태평양전쟁을 끝낸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 언어학자 놈 촘스키(1928~),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 아름다운 멜로디의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 그 뒤를 이은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다니엘 바렌보임(1942~), 흥행 보증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1946~)…

특히 전 세계를 쥐고 흔드는 미국, 그 초강대국의 경제, 과학, 의학, 법률, 교육, 언론 등 주요 분야를 주도하는 세력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그래서 작지만 강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
그렇게 뛰어난 인재들이 풍부한 유대인들이 긴 세월 동안 세계 도처에서 무엇 때문에 그토록 핍박당하고 멸시당해야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원죄? 유별난 전통과 선민의식?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이재(理財)?

어쨌든 그들이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세계 대전과 오스만 터키의 지배가 끝나며 어정쩡한 정세 속에 영국의 통치에 들어갔습니다. 영국은 1차 대전 막바지 유대인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건국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랍인들의 건국을 약속한 맥마흔 선언도 있었습니다. 눈 앞의 승리를 위한 무책임한 약속들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 비극의 씨앗으로 뿌려진 셈입니다. 이미 2천 년 가까이 이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아랍인들과 전후 밀물처럼 밀어닥쳐 나라를 세운 유대인들 사이에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난 10월 7일 가자지구를 통치해 온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지역을 기습해 최소 1,200명을 살해하고 240여 명을 인질로 잡아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대포와 함포로 포격이 이어지고 공군기의 공습으로 가자지구에선 건물, 도로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1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하마스의 기습으로 촉발된 전쟁이기는 하지만 유엔 수장인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이번 사태가 진공상태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가자지구나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숨쉬기도 힘들 만큼 이스라엘의 극심한 통제와 압박 속에 살아왔던 것입니다. 압력이 몰리면 어딘가에서 터지기 마련, 하마스의 무력 도발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던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보복전을 선언하자 세계 여론은 민간인 피해를 크게 우려했습니다. 여론의 압박으로 이스라엘군도 전쟁 초기 가자 지구의 민간인들에게 북부지역을 떠나라고 설득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공격은 지금 남부 주요 도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병원, 학교, 주택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무자비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240만 명의 주민 가운데 약 180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이제 더 도망갈 곳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분명해 보입니다. 하마스의 소탕이 아니라 아랍 주민의 제거일 것입니다. 가자지구를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도미사이드'(Domicide)를 노리고 있다는 우려와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의도적인 거주지 말살 역시 전쟁범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자뿐만이 아닙니다. 요르단강 서안에서도 세계의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유대인 정착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정착촌의 확대는 필시 아랍인들과의 충돌을 촉발하고, 결국에는 이스라엘 군의 진입과 무력행사로 이어지겠지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인 청소가 절대적 목표인 듯합니다.

오랜 세월 살아온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비극은 수천 년간 나라를 잃고 유랑해 온 유대 민족의 슬픈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마스의 무모할 만큼 거칠고 결사적인 항쟁도 그래서 이해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숨 쉴 공간, 살아갈 여건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분쟁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그치지 않는 재앙의 불씨를 심는 일이 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지금 피와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눈 내리던 날

2024년 1월 15일

지난 연말엔 모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며 모두들 즐거워했었지요. 그래도 올겨울 아직 큰 눈은 없었던 편입니다. 한겨울 설경을 마다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눈이 내리면 누구나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눈다운 눈을 처음 본 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역에서였습니다. 고교 진학을 위해 처음 서울 땅을 밟았던 그날 지붕에 하얀 눈을 이고 선 남대문의 모습이 얼마나 웅장했던지요. 눈이라곤 내리다 녹아 사라지는 남녘에서 살다가 처음 마주한 서울의 설경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눈이 불러일으키는 광경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입니다. 우선 도회에선 여기저기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행인들이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며 다치는 일도 생기고, 차가 미끄러지며 부딪히고 도로가 막혀 고생하기도 합니다. 시골에선 이따금 너무 많은 눈이 쌓여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축사가 주저앉는 불행한 사고도 발생하지요.

제가 사는 한적한 동네 골목길 안에서는 뜻밖에 훈훈한 풍경이 연출되곤 한답니다. 창밖 빗자루질 소리에 놀라 뛰어 나가보면 이웃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먼저 나와서 눈을 치우느라 분주합니다. 함께 눈을 쓸다 보면 평소 자주 못 보아 데면데면하던 사이에도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게 됩니다. 좀 언짢은 일로 기피하던 사람과도 화안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눈이 암만 펑펑 쏟아져도 경비원 손길만 기다리는 아파트 마을 풍경과는 딴판입니다.


눈이 제법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설치고 나섰다가 눈과의 싸움이 힘에 부쳐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한참이나 끙끙거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처음 눈다운 눈을 맞았던 옛날이 떠올라 눈사람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원래 재주가 없는 데다 맨손으로 차가운 눈을 만지다 보니 손이 곱아서 제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못생긴 눈사람을 들여다보며 혼자 킥킥거리는데 때마침 이웃집 할머니가 나타났습니다. “아이고, 누가 이렇게 예쁜 짓을 하노?” 팔순을 넘겨서도 고운 얼굴로 소문난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칭찬인지 핀잔인지, 한마디 듣고 보니 눈과의 씨름을 그만둘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늦게까지 쏟아지는 눈이 밤새 쌓이면 어쩌나 싶어 연신 빗자루로 쓸어 보았지만 갈수록 눈발이 굵어져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자동차 기름걸레를 빨 때 쓰던 낡은 나무 빨래판이 생각났습니다. ‘옳지, 그걸로 넉가래를 만들어 볼까.’ 빨래판에 가느다란 각목 장대를 붙여서 나사못을 박아 눈가래를 만들었습니다. 생김새는 엉성했지만 그런대로 쓸 만했습니다. 


스스로도 신통하다 여기며 신나게 눈을 밀고 있는데 때마침 마주친 이가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하며 지나갑니다. 평소 본 적이 없던 사람이니 아마도 이웃에 사는 친지를 찾아가던 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참 후 그 길을 되짚어 지나가던 그이가 “추운데 이걸 끼고 하세요.” 하며 큼직한 장갑 한 켤레를 던지듯이 주고 갑니다. 미처 사양할 새도 없이. 두 손에 끼어보니 속에 두툼하게 털을 붙인 가죽장갑으로 추운 날 눈 치울 때 쓰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뜻밖에 낯도 모르는 이로부터 가죽장갑을 선물 받은 후로는 ‘눈이 언제 오나?’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가죽장갑에 빨래판 눈가래, 얼마나 멋진 조화입니까. 이거, 내 목에 얹힌 멍에 아닌가 싶다가도 그 장갑을 끼고 눈 치울 생각을 하면 절로 유쾌한 기분이 됩니다. 한겨울 차가운 눈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건 솜사탕처럼 하얀 빛 때문만은 아닌가 봅니다. ‘눈이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오겠지.’ 아직 대한이 남았고, 또 보름이 더 지나야 입춘이지만 조바심치듯 눈을 기다리는 꼴이 혼자 생각에도 우스꽝스럽습니다.
 

 

치매와의 공존

2024년 1월 16일

랑데 알츠하이머(Landais Alzheimer) 마을의 시간은 어느 곳보다 천천히 흐릅니다. 급히 서둘 일도 서둘 사람도 없습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이 오히려 마을 주민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입니다. 전직 농부인 프란시스 영감은 마을 중앙 광장의 상점에서 바게트, 음료 등 간단한 식품을 사곤 합니다. 그곳에서 신문을 얻어 읽기도 합니다. 지갑을 빠뜨리고 나온 걸 깜박 잊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상점에서 물건값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비안과 필리프, 두 할머니는 간단한 요리로 함께 식사하고,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합니다. 둘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게 여간 즐겁지 않습니다. 



랑데 알츠하이머의 가게는 주민들이 필요한 물건도 구하고 이웃들과 어울리며 일상생활의 즐거움을 찾게 하기 위한 시설이다.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이곳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들의 마을입니다. 100여 명의 알츠하이머 환자들과 의료진, 자원봉사자가 마을 주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병원이나 요양소에 수용된 환자가 아니라 마을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환자복 대신 저마다 좋아하는 생활복 차림입니다. 스스로 장도 보고, 요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여러 가지 취미활동도 하며 지냅니다. 실제의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을을 관찰해 온 연구진은 이들의 공동생활이 병의 진행을 완화하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환자들은 처음 병을 진단받았던 때와는 달리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여 주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소 입원보다는 이곳 마을 생활이 환자들에게 훨씬 더 심리적 정서적 안정감을 준 덕분입니다. 

환자들이 마을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만큼 가족들 또한 불안과 무거운 죄책감에서 해방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돌보던 때보다 오히려 더 밝아진 환자들의 모습에 안도하게 된 것입니다. BBC가 소개한 이 마을은 2020년 지방 정부에 의해 설립, 운영되는 곳입니다. 환자로부터 일반 요양원 수준의 경비를 받고 있지만 주된 운영비는 지방 정부의 몫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겨울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그 겨울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덜 춥고 덜 가혹하게 맞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의 희망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10여 군데에서 이와 유사한 방식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교외의 호그벡(Hogeweyk) 마을은 세계에서 처음 치매 환자를 마을 주민으로 대우하는 실험을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8년 양로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공동생활의 터를 마련했습니다. 200명 가까운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의 관리실은 티가 나지 않도록 카메라 가게로 꾸며졌습니다. 관리인들도 일상복 차림으로 주민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유의했습니다. 이런 배려 덕분에 주민들은 예전의 일상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 속에서 삶의 안정을 찾는다고 합니다.

일본 도쿄 교외의 카페 ‘오렌지 데이 센가와’는 한 달에 한 번 ‘느린 카페’로 변합니다. 주문한 음료를 10여 분씩 기다리기도 하고, 엉뚱한 음료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불평하는 손님은 없습니다. 치매 노인들이 서빙하는 날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늘어나는 고령인구와 치매 환자들을 돕기 위해 카페 주인은 지방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느린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치매 환자가 폐쇄된 공간에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자기 역할을 찾음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끼고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치매 환자와 일반인들의 공존을 실험하는 이런 카페나 식당 운영은 일본 내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인구의 노령화가 급속히 이뤄지면서 치매 환자도 그만큼 빨리 늘어가고 있습니다. 치매 환자의 치료, 보호는 이제 가정을 뛰어넘어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언론 매체들이 전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치매 현황,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접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 광진구 주민인 OOO 씨(여, 69세)를 찾습니다. 152cm, 54kg. 검정 점퍼, 황토색 긴 팔, 검정 바지. 빨간색 행주 손에 소지. ☎112 서울경찰청

# 성남시에서 실종된 OOO 씨(여, 80세)를 찾습니다. 155cm. 빨간색 패딩, 남색 바지, 파랑 운동화, 분홍 털모자. ☎182 경기남부경찰청 

# 송파구에서 실종된 OOO 씨(남, 76세)를 찾습니다. 짙은 색 중절모, 검정 점퍼. ☎112 서울경찰청

매일같이 사람을 찾는다는 안전 안내 문자가 스마트폰에 날아듭니다. 우리에게도 치매가 얼마나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인지 일깨워 주는 신호입니다. 2022년 기준 만 65세 이상 인구는 898만여 명, 한국중앙치매센터가 추정하는 치매 환자는 96만여 명이었습니다. 65세 이상 노인이 993만여 명으로 늘어난 올해 치매 환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었을 것입니다. 정부가 ‘치매 국가책임제’를 선언하고, 5년 단위로 치매관리종합계획을 세운다지만 우리의 치매 대책은 아직도 자택 또는 병원에서의 치료, 간병을 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치매 걸린 사람이야 행복하지. 세상에 걱정거리가 있나? 시중드는 사람만 죽을 맛이지.” 흔히 농담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 의지로 피할 수만 있다면 가장 피하고 싶은 게 치매라고 합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일입니다. 개인이,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사회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도 치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방안들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봄의 길목에서 노산(鷺山)을 생각한다

2024년 3월 20일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볼까나”

우리 가곡 <봄처녀>의 노랫말입니다. 오늘이 춘분(春分), 봄이 오는 길목에서 무심코 부르곤 하던 그 노랫말의 오묘하고도 섬세한 비유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응당 모두에게 찾아오는 봄이건만 짐짓 ‘행여 내게 오심인가’ 하는 능청스러운 표현에 절로 웃음 짓게 됩니다. 다가오는 계절의 모습을 어쩌면 이토록 멋진 시어로 바꿀 수 있을까. 시인의 살아생전에 지금처럼 번역문학이 성하고 우리 문화가 널리 알려졌더라면 노벨 문학상을 받고도 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고파>의 시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이 노래 한 편으로 이미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지요.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이 곡을 붙인 <가고파>는 국민 망향가였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북녘땅에서 태어나 남녘에서 피란살이해 온 실향민들에게도 으레 고향을 그리는 노래는 <가고파>였습니다. 

노산은 시인의 울타리에 묶어 두기엔 너무도 넓은 세계를 품에 안은 위인이었습니다. 산천을 탐사하는 인문지리학자요 산악인이기도 했으며, 옛 인물을 연구․기술하는 역사가이자 문장가에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였습니다. 조국 강산을 그보다 더 열심히 답사하고 탐구하며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지어 바친 이도 없을 것입니다. 노산은 20대서부터 한반도 전국 방방곡곡을 순례하며 수많은 시문을 남겼습니다. 금강산만도 다섯 차례나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에게 조국의 강과 산은 신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굽이쳐 흐르는 물! 여보 이게 압록강이요?/ 물은 연방 흐르는데 발은 붙어 안 떨어진다./ 이 강아 작기나 하렴! 한번 안아라도 보게./ 무수한 의인(義人)들이 울며 넘던 강이길래./ 눈 못 감는 원혼(寃魂)들이 울며 도는 강이길래./ 두 다리 펼치고 앉아 목을 놓아 버린다.” <압록강, 1935>

"바라보라 저 산과 바다 저 하늘과 들판/내 역사와 전설이 고였고/대대로 누려온 곳/조국아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낙조보다도 더 쓸쓸한 조국아/ 긴긴 밤 가얏고 소리 마냥 가슴을 파고드는 네 이름아.”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1951>

백두산, 칠보산, 묘향산에서 구월산, 금강산, 설악산, 삼각산, 태백산, 속리산, 계룡산, 가야산을 훑고 지리산, 무등산, 월출산, 대둔산을 넘어 한라산까지.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에서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을 건너 낙동강까지. 전국의 강산을 빠짐없이 챙겨 쓴 그의 시문을 읽다 보면 조국 강토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 민족에 대한 애정과 역사의식을 안고, 조국 산천을 편력하며 아름다운 시문을 남긴 그를 국문학자들은 민족의 시인, 역사의 시인, 자연의 시인이라고 평가합니다.

노산은 책상을 붙잡고 앉아 머리로 시를 지어내는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을 몰아붙여 강과 산을 훑으며 온몸으로 느끼는 감동을 시어로 옮기는 시인이었지요. 말년에는 한국산악회 회장직을 맡아 산악계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앞장섰습니다. ‘산악인의 선서’, ‘산악인의 노래’를 손수 지었습니다. 월보《산》을 창간하고, ‘등산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해 산악인을 양성했습니다. 1982년 히말라야에 파견한 원정대가 세계 제5봉 마칼루(8,463m)에 등정했다는 낭보를 병상에서 듣고 기뻐하던 노산은 4개월 후 영면에 들었습니다. 

오랜 기간 해외 여러 나라에 옮겨 살다 모처럼 고국을 찾아온 친구에게 노산의 조국 찬가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서울 시내 대형서점 어디서도 그의 작품집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시조집이든 기행문집이든 모든 작품이 오래전 절품되고 더 이상 출판된 것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청계천, 동묘 등등 헌책방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 허사였습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조국 강산을 찬미했던 대시인의 시집 한 권, 문집 한 권 구할 수 없다니, 아쉬움과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겠지, 했던 태만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땅 위에서는 노산을 기리는 기념관, 문학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애초 노산 이름을 붙여 세우려던 문학관이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마산문학관’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합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노산문학관’으로 바꾸자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저지되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대시인 노산이 그가 노래한 고향 바다, 고향 땅에선 전혀 자랑스러운 인물이 아닌 겁니다.


2013년 로타리클럽이 마산역 중앙광장에 세운 ‘가고파 노래비’는 안타깝게도 마산 시민들의 갈등의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을 옹호한 그가 민주 항쟁의 상징도시 마산을 대표하는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노래비 바로 옆에 노산의 행적을 비판하는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를 쇠말뚝처럼 박아 놓았습니다. 2015년엔 ‘재경마산향우회’가 <가고파>를 작사․작곡한 이은상-김동진 동상 건립을 추진하다 역시 시민단체들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봄처녀>가 일제에 영합한 홍난파(洪蘭坡, 본명 永厚, 1897~1941) 작곡, 독재를 찬양한 이은상 작사여서 부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쇼스타코비치 평전을 쓴 줄리안 반스의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반스는 말합니다. “(스탈린 치하의 어두움을 견디며) 쇼스타코비치가 바랐던 것은 죽음이 그의 음악을 해방시켜 주는 것, 자신의 삶으로부터 음악을 독립시켜 주는 것이다. 언젠가 굴욕의 시대가 지난 뒤에도 들을 가치가 있다면 그의 음악은 정말 음악이 될 것이다.”

노산이 친일파였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노산은 그런 이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가하기 훨씬 이전 민족의 얼, 우리말을 지키려다 일제의 쇠고랑을 차고 차디찬 감방에 끌려갔었습니다. 일제 치하 이 산 저 골짜기 찾아 헤매며 조국 강산의 예찬에 신명을 바쳤습니다.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문학 작품에 차고도 넘칩니다. 일제 간섭에 못 이겨 신문사를 도망치듯 물러나와 책상 위에서는 소리 없는 눈물을, 강과 산에서는 소리 내어 울음을 쏟아냈습니다. 위대한 시인의 나라 사랑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나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고파>의 시인 노산 이은상의 육신은 평생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노산의 영혼은 아직도 고향을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 큰 위인을 품기엔 후세의 가슴이 너무 좁고 옹졸한 탓입니다.

 

 

오랜만의 명동 나들이

2024년 4월 19일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와 명동 산책에 나섰습니다. 마침 오래전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아들이 회사와 제품 홍보를 위한 쇼룸(전시장)을 열었다기에 응원도 할 겸 거리 구경도 할 겸 명동을 찾게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명동 진출은 철부지들의 로망이었지요. 학교의 큰 행사를 마친 여흥으로, 이성 친구와의 데이트 코스로 큰맘 먹고 찾던 곳이 명동이었습니다. 맥주 홀엔 젊은 열기가 넘쳐났고, 음악다방엔 낭만이 넘실거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음악다방에선 DJ가 손님들의 신청을 받아 올드 팝송을 들려주었지요. 그러나 클래식 음악만 고집하는 곳도 여럿 있었습니다. 지금도 주인이 칠판에다 백묵으로 “Beethoven- Symphony No. 6 in F major, op. 68 ‘Pastoral’‘이라고 휘갈겨 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커피 한 잔으로 그런 긴 음악을 몇 곡씩 들으며 버텨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선 점심부터 먹자 해서 오래전 다니던 칼국수 집을 찾아갔습니다. 가장 붐빌 시간은 지나고 꽤 늦은 시각이었는데 놀랍게도 만원, 계단으로 긴 대기 줄이 이어졌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손님의 반 이상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것도 소위 말하는 ‘K-문화’ 바람인가? 별로 익숙하지 않을 뜨거운 칼국수와 마늘 냄새가 진동하는 김치를 열심히들 먹고 있었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신기하다는 듯 싱글벙글하는 그들의 들뜬 분위기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시름에 잠겼던 때의 명동 거리가 생각납니다. 마치 유령의 거리처럼 음산했던 명동을 두려운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잠시 돌아본 적이 있었지요. 텅 빈 진열장, 더러는 시뻘건 페인트로 큰 유리에 X자를 그려 놓고, 더러는 깨어져 구멍이 뚫리고, 군데군데 지저분하게 쌓인 쓰레기 더미… 영화에서 보던 유령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불을 밝힌 상점을 보게 되면 마치 망망대해를 헤매다 등대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코로나 말고도 사드(THAAD) 배치에서 비롯된 한중 갈등으로 중국 단체관광의 발길이 끊어지고, 엔저에 힘입은 일본 관광 붐이 일어나며 명동 경기는 그야말로 비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지요.

명동에 문을 연 친구 아들 회사의 쇼룸
그곳에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아들이 지난 연말 특이한 전시장을 열었습니다. 나이 든 제 눈엔 박물관이나 정반대로 오락장 입구 같기도 한 외장(外裝)이었습니다. 훤히 트인 내부에선 큼직한 스크린에 멋진 영상이 돌아가고, 간결한 상품 진열대가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를 낸 화장품 브랜드의 쇼룸이랍니다. 외국 관광객들을 겨냥해 우리말은 물론 중국어, 영어에 능통한 젊은 여성들로만 직원들을 뽑았다고 하네요. 


명동 유네스코회관 앞길 풍경
재주 많고 후덕해 주변의 신망이 두터웠던 친구는 벌써 29년 전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때 친구의 아들이 겨우 초등학교 5학년생. 아버지 친구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 가는 곳마다 매미, 메뚜기 잡아달라 떼를 쓰곤 하던 꼬마 소년이 어머니의 지혜로운 양육으로 지금 직원 150여 명의 생활을 책임지는 어엿한 중소기업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미국, 중국, 베트남에 판매망을 구축한 회사의 연간 매출은 3천억 원 정도. 명동 쇼룸은 말하자면 해외 구매자들에게 신뢰를 더해주기 위한 본사의 시위 무대 격이랍니다.

친구 아들의 쇼룸처럼 명동 이 골목 저 골목에 새로운 상점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해 보였습니다. 명동을 찾아 골목길을 오가는 해외 관광객들의 숫자도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네스코회관 앞에서 명동 성당에 이르는 대로는 아직 좀 허전해 보였습니다. 

명동은 오랫동안 우리나라 쇼핑 1번지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국내 땅값 순위 1위부터 8위까지가 명동에 몰려 있다는군요. 지난해 국토교통부가 공개한 공시지가에서 1위가 충무로 1가 ‘네이처리퍼블릭’ 부지(169.3㎡)로 평방미터당 1억7,540만 원이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명동은 건물만 크고 높다랗게 올라갔을 뿐 숱한 발길이 오가던 예전의 아기자기함이나 흥겨운 정취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모처럼 다시 찾아본 명동 거리를 거닐면서 이곳이 예전처럼 다시 젊은이들의 열기가 넘쳐나는 곳, 쇼핑백을 든 외국 관광객들의 물결이 넘쳐나는 곳이 되기를 빌었습니다. 명동이 우리 경제 부활의 상징이 되어 주기를, 그리고 친구의 장한 아들이 명동 부활의 선봉장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작은 성의, 큰 은혜

2024년 5월 21일

기사 마감으로 분주하던 어느 날 오전 웬 꼬마 아가씨가 신문사 편집국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앳된 여학생인데 축구 국가대표 김주성 선수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꽤나 먼 전북 정읍에서 어린 여자아이 달랑 혼자서. 

“그럼 축구협회로 가보든가 해야지, 왜 신문사로 왔어?” 
“그리로 가면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웬만하면 그냥 돌려보냈겠지만 그 멀리서 신문사로 찾아온 어린 학생의 지혜(꾀?)와 당돌함에 감탄했습니다. 마침 국제대회에 대비해 국가대표팀이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이었고, 취재 약속도 되어 있던 참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대표팀 막내이던 김주성 선수는 축구 팬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었지요.

함께 점심을 먹고 대표팀 훈련장에 도착해 잠시 휴식 중이던 김주성 선수를 불러냈습니다. 

“이 학생이 당신의 열렬한 팬이래. 정읍서 당신 보고 싶어 여기까지 찾아왔대!”

여학생으로부터 꽃다발 선물을 받아 든 김주성 선수는 선배들 앞이라 조금 멋쩍어하면서도 흔쾌히 기념사진도 함께 찍고 고맙다는 인사도 건넸습니다.

긴긴 세월이 흘러 신문사 일을 접고, 어느 주간신문에서 젊은 기자들이 쓴 기사를 보아주며 소일하던 때였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 효선이에요. 옛날 신문사 찾아갔었던.”
“어, 그래 효선이. 그런데 웬일이야? 어떻게 날 찾아냈어?” 

우연한 기회에 자유칼럼을 읽게 되었답니다. 거기서 제 이름을 발견한 것이지요. 기어이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다 해서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옛날 처음 신문사로 찾아왔을 땐 겨우 중학생이었다는군요. 전 고등학생쯤으로 기억했었는데.

효선은 그때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자랑자랑 했었답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부모님께서도 생면부지의 딸을 알뜰히 챙겨준 신문사 사람들에게 무척 고마워하시더랍니다. 효선은 그 뒤로 공부도 열심히 해서 항공사에 입사했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곳저곳 여행을 시켜 드리며 이름처럼 효행도 실천했고요. 

조금 늦게 결혼한 효선은 어느 날 별안간 쌍둥이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 또 한 번 유쾌한 추억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함께 저녁 먹는 동안 입맛도 성격도 다른 쌍둥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젊은 엄마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 곁에서 거들던 저도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습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가까스로 두 녀석의 성화를 달래며 그래도 만면에 기쁨이 가득하던 효선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효선이 보내온 남해 금산 보리암 풍경
그렇게 또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전혀 예고 없이 효선의 일방 통보를 받았습니다. 지금 남해에서 휴양 중인데 마침 싱싱한 문어를 구했으니 보내겠다는 거였습니다. 

“아니, 남해에는 왜? 어디 많이 아픈가? 부모님은?”

이런저런 질문에 답하던 효선이 갑자기 울음 섞인 목소리로 “건강하시죠?” 하고 되묻는 바람에 그만 입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건강히 잘 계신다고… 효선의 울음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 때문인지, 혹시 제 자신의 건강 때문인지, 마음이 천 길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대신 서울 올라오면 꼭 한 번 만나야 돼! 알았지?”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을 두고 주소를 알려주었건만 효선은 또 꿩 구워 먹은 듯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다시 둘의 숨바꼭질이 시작된 것이지요. 

작은 인연이 평생의 교분으로 이어진다더니 효선과의 만남이 그런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베푼 작은 편의에 비해 효선의 보은은 감당키 어려울 만큼 크기만 합니다.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 주곤 하니까요. 이렇게 실명을 드러내어 떠드는 이유는 오로지 효선에게 가할 반격의 수단이 마땅치 않은 까닭입니다.

"효선, 쌍둥이랑 밥 한 끼 먹자니까!"
 

 

넘쳐나는 가짜 뉴스, 무얼 노리는 걸까요?

2024년 6월 19일


전직 사우들에게 모임을 알리고 안부를 전하는 카톡방에 최근 한 회원이 뜻밖의 소식을 올렸습니다. ‘원조 팜므파탈’ 배우 김지미(본명 金明子; 1940.7.15 ~ ) 씨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3분 46초짜리 동영상은 KBS의 단독보도를 전하는 거라면서 미국에 살고 있던 영화배우 김지미 씨의 돌연한 별세 소식을 전했습니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 김지미 씨가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딸이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안타깝게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84세로 영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로 배우 김지미 씨의 별세와 그녀의 일생을 소개한 가짜 동영상
동영상은 고인이 엘리자베스를 닮은 미모에 팔색조 연기로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네 번의 결혼과 이혼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또 김 씨가 미국의 억만장자 사업가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사업가가 고인의 호화생활을 지원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영화계가 큰 슬픔에 빠졌다고도 했습니다. 

정말 그런가? 신문, 인터넷 페이지를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관련 기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거짓 기사에 낚인 것일까? 아니면 해외에 거주하는 그녀의 소식을 우리 신문, 방송이 미처 못 챙긴 것일까?

궁금증은 바로 다음 날 일거에 풀리고 말았습니다. 예전 연예 담당 기자로 맹활약했고, 지금도 영화예술 관련 단체 임원으로 그 분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동료 회원이 김지미 씨의 근황을 알려준 덕분입니다.

“세상을 혼란케 하는 구독자 유혹 사기 가짜 유튜브 정보입니다. 김지미 씨는 오래전 미국에 이주해 살고 있으며 최근에도 안부를 확인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그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인터뷰 365>에 ‘김지미 씨는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제목을 붙여 그녀의 근황은 물론 가짜뉴스로 받은 충격과 고통, 가족들의 염려 등을 상세히 전달해 주었습니다. ‘소란스러운 연예계를 떠나 평온한 삶을 즐기던 김지미 씨가 뜬금없는 사망 소식으로 본인은 물론 국내외의 친지들까지 밤낮으로 시도 때도 없이 생사 확인 전화를 받고 답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김 씨의 친지가 본인을 대신해 보내온 입장문도 소개했습니다. 

“황당한 가짜뉴스 때문에 며칠 동안 국내외 여러 친지들이 문의 전화, 애도 문자를 받느라 바빴습니다. 김지미 씨는 건강 관리를 착실히 잘해서 나이에 비해 훨씬 건강한 심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의 폐해가 피해 당사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불필요한 정력을 소모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런데 정말 왜 그럴까요? 가짜 정보를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들어 돌려서 무얼 얻으려는 걸까요? 사람들 시선을 끌어 동영상 조회수를 올리고, 돈 몇 푼 벌어보겠다는 얄팍한 계산? 제 아둔한 머리로는 그런 정도 외에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한심스럽고 괘씸하고 화가 날 뿐입니다.

거의 매일 카톡을 주고받는 친구가 어느 날 잘 짜인 거짓 미담을 보내온 적이 있었습니다. 전부터 여러 번 보고 듣고 거짓임이 확인된 이야기였지요. 

“고맙긴 하지만 이건 가짜잖아!”

“그래도 재미있잖아?”

아닙니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가짜는 가짜일 뿐입니다. 가짜가 나쁜 점은 진짜와 혼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창작해 낸 이야기[fiction]라고 밝힌다면야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게 아니라면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고, 그래서 좋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진실은 사람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가짜는 사람의 눈물을 훔치는 거짓일 뿐입니다.
 

 

‘환희의 송가’ 탄생 200주년

2024년 7월 17일


1824년, 그러니까 200년 전 세계 음악의 수도 빈(Wien)의 봄 이야기입니다. 정원에서 들판에서 아름다운 봄꽃들이 피어나던 무렵이지요. 노년의 음악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3.26)이 새 교향곡 발표를 준비한다는 소문도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지며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7번과 8번 교향곡을 작곡한 지 10년이 넘은 때였습니다.


1820년 요제프 칼 슈틸러가 그린 베토벤 초상화
1792년 스물두 살 젊은이로 빈에 정착한 이래 베토벤은 여덟 개의 교향곡과 소나타, 협주곡 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빈 청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른 대가의 대작에 쏠리는 관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요. 극장들 사이에는 벌써 새 교향곡의 초연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뜻밖에 또 다른 소식이 빈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베토벤의 새 교향곡이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초연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빈의 관심이 이탈리아풍의 음악에 쏠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베토벤 자신이 독일 본(Bonn) 태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오랜 세월 빈에서 활동하며 음악의 대성을 이룬 그가 빈이 아닌, 베를린을 선택하다니. 빈 청중이 고루해서 그의 음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가. 빈 음악계로서는 거의 모욕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빈의 음악가, 시인 등 30명이 베토벤을 열정적으로 설득하는 공개서한을 띄웠습니다. "귀하의 이름과 창조물은 예술에 공감하는 동시대 모든 인류와 모든 나라의 것이지만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오스트리아 3화음(triad)’를 완성하는 것이 귀하의 예술적 의무다. 빈에 참되고 아름다운 것의 새로운 권위를 확립해 달라.” 편지에 감동한 베토벤의 동의로 새 교향곡 초연은 그해, 1824년 5월 7일 빈 케른트너토르 극장(Kaerntnertor Theater)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62년 도이체 그라마폰이 발매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집 표지
올해는 그러니까 혁명적 양식, 놀라운 악상에 확고한 메시지를 담은, 시공을 초월하는 베토벤의 걸작 교향곡 9번 D단조가 발표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새삼스레 9번 교향곡을 떠올리는 이유는 최근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이 음악 초연의 뒷이야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나 공연 계획을 취소하고 공연장을 바꾸는 변덕… 베토벤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 극장 측은 귀먹은 그에게 지휘봉을 들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 지휘자로 선임된 미하엘 움라우프(Michael Umlauf)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게 베토벤의 지휘를 무시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연주가 끝나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오는데도 베토벤이 여전히 두 팔을 휘두르자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Caroline Unger)가 그의 소매를 끌어 청중석을 돌아보게 했다. 화산이 폭발하듯 거듭되는 격렬한 청중의 호응에 위험을 느낀 경찰이 마침내 “조용히 하라”며 제지에 나섰다 등등. 

베토벤이 9번 교향곡 4악장에 실은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는 자유에 대한 찬가이며, 세계 인류의 평화와 형제애를 희구하는 노래입니다. "모든 인류는 형제가 되리라!(Alle Menschen werden Brueder!)" 유럽 전역에 혁명의 기운이 흘러넘치던 시절 십대의 베토벤은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이 가득 밴 프리드리히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1.10~1805.5.9)의 시에 심취했습니다. 열다섯 때 처음 접한 ‘환희의 송가’를 가슴에 새기며, 언젠가는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지요.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합창으로 담은 교향곡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에게 헌정한다고 쓴 베토벤의 자필.
잘 알려진 것처럼 베토벤의 일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버지의 욕심에 의한 가혹한 음악 교육, 어머니의 너무 이른 죽음, 조카 양육권을 둘러싼 법정 다툼, 20대 중반부터 시작된 귓병, 청력을 상실한 음악가로서의 절망... 서른한 살 되던 해 휴양 중이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두 동생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까지 헸습니다. 전제정치의 암울함, 새 시대를 갈망하는 혁명과 전쟁이 범벅된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심신의 질곡과 고난 속에서 베토벤은 20여 년 전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소생시켜 마침내 자유와 평화, 인류애를 노래하는 위대한 음악을 완성했습니다. 그로부터 ‘환희의 송가’는 인류의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단체, 행사의 주제가가 되었지요. 

유럽공동체 시절부터 회원국들의 평화와 결속을 다짐하며 주요 행사에서 ‘환희의 송가’를 연주해온 유럽연합(EU)은 1985년 이를 공식 찬가로 채택했습니다.

독일은 동서 분단시대이던 1956년 멜버른 대회서부터 1964년 도쿄 대회까지 총 6회 하계 및 동계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참가하며 ‘환희의 송가’를 국가로 사용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통일 독일을 기원하며 장벽 양쪽에 나뉘어 살았던 음악가들을 모아 9번 교향곡을 연주했지요. 특히 4악장의 합창에서 ‘환희(Freude)’를 원래 실러가 의도했던 대로 ‘자유(Freiheit)’로 바꾸어 노래해 더욱 뜻깊은 연주가 되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2006년 이스라엘과 아랍의 젊은 음악가들로 창단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중동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하면서.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200년이나 지난 지금 왜 우리는 아직도 ‘환희의 송가’를 갈망하는가?(Why We Still Want to Hear the ‘Ode to Joy,’ 200 Years Later?) 9번 교향곡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뉴욕타임스는 그렇게 물었습니다. 지구촌에는 오늘도 여전히 총성이 울리고 포연이 피어오릅니다. 아이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습니다. 어머니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은 인간의 숙명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이겠지요.

*1989년 번스타인 지휘 베를린 연주 광경
 

 

방글라데시의 교훈

2024년 8월 19일

면적 14만 7,570㎢(세계 93위), 인구 1억 7,470만 명(세계 8위), 1인당 GDP 2,688달러(세계 112위). 세상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지지난 주 큰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한때 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Wazed, 1947~ ) 여성 총리가 독재자, 불공정의 상징으로 규탄받으며 정권의 종말을 맞은 것입니다. 



방글라데시 대학생들의 시위 광경
20여 년 군림해 온 정권이 무너지는 데는 채 몇 주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시나 총리는 시위대에 쫓겨 그녀의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습니다. 인도로 피신한 그녀의 종착지가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방글라데시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정변, 도를 넘는 정쟁을 보고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는 방글라데시가 아직 동 파키스탄이라 불리던 1947년 다카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은 언어, 민족,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서)파키스탄의 탄압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민족 지도자였지요. 1971년 마침내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발생한 쿠데타 와중에 라흐만 부부와 아들 형제들이 모두 피살되고, 하시나는 여동생과 함께 해외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1981년 조국으로 돌아온 셰이크 하시나는 아버지가 이끌던 아와미연맹(AL)의 총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그동안 체포되거나 암살 시도를 겪기도 여러 번이었지요. 

한편 1975년 쿠데타로 하시나의 아버지 라흐만을 숙청했던 지아 울 라만(1936~1981)은 이후에도 거듭된 쿠데타에서 살아남아 1977년 7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2년 쿠데타에서 결국 피살되고 맙니다. 9살 연하의 부인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1945~ )도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지요. 방글라데시 국민당(BNP)의 당수가 되었습니다.

혈육의 원수이자 정적이기도 한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 두 여성은 한때 손을 맞잡고 야당 연합을 결성해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1991년 두 사람의 힘으로 후세인 무함마드 에르샤드(1930~2019) 군사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칼레다 지아는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고요. 재임 기간 그녀는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고, 산업 발전에 적잖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악화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파업과 시위로 1997년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AL에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2001년 BNP의 칼레다 지아에게 패배, 잠시 정권을 잃었으나 2009년 재집권, 최근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지켜왔습니다. 하시나도 인도와 물 공유 협정을 체결하고, 의류산업을 촉진하고, 갠지스 강을 가로지르는 파드마 대교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기대 이상의 경제적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위)와 무함마드 유누스
그러나 정쟁 속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두 여성의 30년 통치 기간에도 권력투쟁의 소음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버스 폭탄 테러, 실종, 살인 등 군사독재 때나 다름없는 공포가 나라의 일상이 되었지요. 지난 1월 선거에서 하시나가 네 번째 임기의 총리직을 굳혔지만 야당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하시나 정권이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라는 비난도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녀를 비판하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1940~ ), 야당 지도자 칼레다 지아 등은 수없이 기소당하고 감옥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정권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독립 유공자 자녀를 위한 공무원 할당제 시비였습니다. 극심한 실업난 속에 공직의 약 30%를 독립 유공자 자녀에게 우선적으로 할당한다는 정책에 대학생들이 반발, 시위에 나선 것입니다. 매년 약 40만 명의 대학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가 안정적인 공직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공직 3,000개 가운데 3분의 1가량을 원천적으로 빼앗긴다는 데 대학생들은 분노했습니다. 게다가 명분이 독립 유공자 우대일 뿐 정권에 힘이 되어줄 기득권 세력의 강화책이라는 게 시위 학생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지난 7월 18일 처음 시위가 시작되자 정부는 최루탄, 고무탄, 심지어 실탄까지 발사하고, 휴교령과 통금령을 내리며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서만 1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21일 대법원이 독립 유공자 공직 할당률을 5%로 대폭 낮추고, 2%는 소수 민족과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돌리도록 중재안을 내면서 소요는 다소 진정되는 기미였습니다. 그러나 28일 시위를 주도한 학생 지도자 3명이 구금되면서 사태가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9일 시위가 재개되었고, 8월 4일 하루에만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진압군도 작전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일 오후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사임을 발표하고 여동생과 함께 군 헬기로 이웃 나라 인도로 도피의 길을 떠났습니다. 분노한 시위대가 한때 국부로 불리던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동상을 파괴하고, 집권당 사무실에 불을 질렀습니다. 6일 군부와 시민단체, 각계 대표단은 시위대 학생대표들과 논의 끝에 무함마드 유누스를 과도정부 최고 고문으로 선임했습니다. 담보 없는 소액 대출로 서민들에게 민생 회복의 길을 열어준 그라민은행 설립자 유누스가 이제 방글라데시를 이끌어 갈 새 정부 탄생의 대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방글라데시 소요 사태는 우리 국내의 과도한 정쟁의 위험뿐만 아니라 현재 시행 중인 국가 유공자, 5.18 유공자 취업 가산점 시혜의 위험성을 돌아보게 합니다.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보상과 생활·의료·교육 지원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일 것입니다. 그러나 취업 우선권을 부여하는 정책은 위정자들에게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안성맞춤의 지원책이겠지만 평생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날밤을 새우는 청년들에겐 부당한 일자리 탈취로 비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취업 시험을 치르는데 그들에게만 과목마다 전체 문항 중 5~10%를 미리 맞은 것으로 동그라미 쳐 주는 불공정한 짓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졸업을 미루고, 수십 수백 장의 취업 원서를 쓰고, 캥거루 소리 들어 가며 양육 책임을 다한 부모 밑에 빌붙어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겐 마치 일자리를 도둑맞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때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에게 5% 가산점을 부여하는 혜택이 여성단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큰 사회적 논란이 되었습니다. 병역필자 가산점 제도가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 공무담임권,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헌법소원 심판이 청구되었습니다. 결국 이 제도는 헌재 재판관 전원 일치 위헌 결정이 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로 인한 시비는 지금까지도 남녀 성 대결적 양상의 갈등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을 위해서는 헌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산점을 부활시키려는 노력보다 군 복무 기간 중 사회 진출에 도움이 될 자기개발 프로그램의 시행 등 보다 체계적이고 공정한 지원방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국가 유공자나 5.18 유공자에 대한 가산점 시혜 역시 그런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인종 청소’의 광기

2024년 9월 23일

기원전부터 20세기까지 유대인들이 겪어 온 비극은 책으로 영화로 수도 없이 본 것 같습니다.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그 비극의 결정판이라고 하겠지요. <안네의 일기>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등등, 책과 영화를 읽고 보면서 아무 상관도 없는 이역의 그들이 겪은 고통에 눈물 흘린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나라와 땅을 빼앗기고 수천 년 세계 각처를 유랑하며 살았을까요? 왜 그러면서도 동정과 위로를 받지 못하고 멸시와 박해를 받게 되었을까요? 그런 의문도 가시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월터 스코트의 <아이반호>에서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도 유대인은 위로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역사의 피해자인가? 언제부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현대에 들어서만은 그들은 사위를 에워싼 아랍 세력을 억누르고, 이웃 나라 영토까지 강점한 강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최근 가자 지구에서, 요르단강 서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그들이 한때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다는 동정 의식마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은 도리어 그들이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가해자, 범죄자의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숨져 가던
임신부에게서 태어난 여자 아기 사브린 알 루
지난 4월 이스라엘군의 대대적 공습으로 가자 남부 라파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날 주택 두 채가 무너지며 일시에 19명의 민간인들이 무참히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숨져 가던 한 임신부에게서 귀한 생명 하나를 건졌습니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30주가 된 1.4kg의 여자 아이 사브린 알 루(Sabreen al-Rou)가 태어난 것입니다. 

루의 어머니인 사브린 알 사카니는 그날의 날벼락으로 남편, 네 살 난 첫딸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참극 속에서도 루의 탄생을 모두들 ‘가자의 기적’이라며 기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자의 작은 희망 루는 태어난 지 5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루’는 아랍어로 ‘영혼’을 뜻한다고 합니다. 아기의 영혼이 가자를 버리고 엄마를 찾아간 것일까요. 오늘의 팔레스타인의 슬픔을 말해주는 단막극 같습니다.

가자의 현 사태를 하마스의 불법적 기습과 인질 납치의 탓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전면적인 압박과 제재로 극한적 상황에 몰려 있었습니다. “가자 사태가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지적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자 북부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보복 작전은 벌써 오래전 최남단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피란처를 제시해 놓고 바로 다음 날 그 피란처를 때리는 식으로 작전을 수행해왔습니다. 민간인들이 피해 다니는 지역마다 쫓아가며 대피령을 내리고, 공습하고 포격하는 식이지요. 공격 대상엔 난민촌이고 병원이고 학교고 아무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가자에서 벌어진 참상은 BBC를 비롯한 여러 언론을 통해 꾸준히 보도되었습니다. 한때 가자 남부 나세르 병원에 수용되었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소식이 일시에 끊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이 지나간 후 병원 안뜰에서는 집단 무덤 여러 개가 발굴되었습니다. 목격자들은 일부 시신의 손이 묶여 있었고, 절단된 손과 다리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암매장된 시신이 쏟아져 나온 데 대해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관계자도 "인도주의의 심각한 위반 사례"라고 지적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을 치료하던 외과의사가 이스라엘군에 끌려간 후 교도소에서 사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피랍 인질 구호와 휴전을 촉구하는 이스라엘 시민들의 시위
피랍 인질 가족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인질 구호나 휴전에는 별 뜻이 없어 보입니다. 미국 대학가에서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규탄 시위를 벌였지만 시위를 막지 못한 총장들이 쫓겨났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청소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환호하는 분위기입니다.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 부의장 니심 바투리가 지난해 11월 X(옛 ‘트위터’)에 “우리에겐 단 하나의 공통된 목표가 있다. 바로 지구상에서 가자 지구를 없애버리는 일이다. 당장 가자 지구를 불태워야 한다!”고 썼습니다. X측 요청으로 글은 삭제되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의 의중을 정확히 드러낸 셈입니다.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물자 공급조차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미국 구호단체 ‘월드 센트럴 키친’의 차량이 이스라엘군 포격을 받아 7명의 직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해 미국 정부를 당황케 했었지요. 이런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이스라엘은 “실수였다”고 간단히 변명했을 뿐입니다. 

지난주 연 이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레바논의 가게와 길거리에서 수천 대의 페이저(무선호출기)와 수백 대의 무전기가 일시에 폭발, 수천 명의 사상자가 쏟아져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외신들은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구매한 통신장비의 인도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폭발장치를 심어 이번 사태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세계의 언론과 인권단체들이 일제히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비난하고, 헤즈볼라는 보복을 공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명 대신 다음 날 레바논에 100발의 로켓 포화를 퍼부었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지능과 함께 섬뜩한 살의, 민간인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기만적인 살상 행위에 할 말을 잊게 됩니디. 

이스라엘의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을 제재할 방법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난 연말 남아프리카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인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었지요. 구속력 없는 ICJ가 취한 조처는 겨우 “집단학살을 선동하는 공개 발언을 막아야 한다”는 뜨뜻미지근한 판결이었습니다. 바로 이틀 후 이스라엘 국가안보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 지구를 떠날 수 있게 촉진하고, 그 자리를 이스라엘 정착민이 대체할 수 있도록 장려하자”고 조롱하듯 응수했습니다.


<더 타임스>에 게재된 삽화가 이스라엘군 가자 작전의 속셈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전쟁범죄 혐의로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하자 미국 하원은 도리어 ICC에 대해 미국 비자 발급 제한, 경제 제재의 보복을 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미국과 그 우방의 이스라엘 옹호로 국제기구는 한갓 허수아비 노릇에 그치고 만 셈입니다. 남미의 콜롬비아, 볼리비아, 벨리즈 등이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에 대한 비난 성명과 함께 단교를 선언했을 뿐입니다.

우방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공공연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 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정착민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두 민족 간의 충돌은 너무도 뻔하고, 팔레스타인의 돌팔매질에 대한 이스라엘의 포화 응수도 너무나 뻔해 보입니다. 지금 서안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의 테러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구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청소는 너무도 명확한 목표로 드러나 보입니다. 그 목표는 가자에서,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쓸어내야 달성되겠지요. 그 과정에서의 마찰과 폭력은 불문가지입니다. 가자에서 벌어지는 무차별 공격과 무자비한 살륙 행위들을 보고 들으면서 언뜻언뜻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저질렀던 ‘인종 청소’의 광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수원 화성의 휴일 풍경

2024년 10월 25일

얼마 전 일요일 친구 몇몇과 함께 수원 화성(水原 華城) 산책길을 걸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안팎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자녀들을 이끌고 나온 젊은 부부, 손을 맞잡은 노부부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너른 공터에서는 아이들과 연날리기하는 가족들도 보였습니다. 성곽 안쪽과 바깥쪽을 두루 살피기 위한 공심돈(空心墩)이나 봉수대 역할을 했던 봉돈(烽墩)이 신기했던지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유심히 살피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화성은 정조(正祖)가 당쟁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마을을 조성하며 세운 것이라 합니다. 규모로 보아 도성을 옮기고자 하는 뜻은 전혀 아닌 듯하고, 효심과 왕도정치 구현의 상징쯤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축성에는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실학의 거두 정약용(丁若鏞), 천재 화가 김홍도(金弘道) 등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참여했다고 하지요. 


연못가 잔디밭에 점심 자리를 잡은 시민들
성곽이나 건축의 견식이 없어 잘 모르긴 하되 국내에 이처럼 예쁜 모습의 성도 별로 없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성곽 안팎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공원과 산책로가 시민의 휴식처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보였습니다. 

한참을 걸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아래 연못가에 도착했습니다. 연못 주변 잔디밭에서는 여기저기 시민들이 자리를 펴고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소리, 피어나는 웃음꽃이 음악처럼 정겨웠습니다. 

화홍문(華虹門) 아래 수원천(水原川) 물길 따라 늘어진 수양버들 그늘로 산책하는 남녀노소, 물길 수초 그늘에서 노니는 팔뚝만 한 잉어 떼, 그 사이를 몰려다니는 송사리 떼, 아예 텃새로 자리를 잡은 듯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흰뺨검둥오리, 미동도 않고 그린 듯이 앉아 작은 물고기를 노리는 왜가리...

수원천과 정조로(正祖路) 사이 통닭집들은 손님들이 넘쳐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십여 미터는 되어 보였습니다. 오래 앉아 있기 미안해서 서둘러 맥주컵을 비웠습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우리 일어설 테니 자릿값 주세요.” 했더니 방긋 웃음으로 배웅합니다.


수원천을 유영하는 오리들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의 휴일 풍경이었습니다. 예전엔 꿈에서도 그려볼 수 없었던, 오래전 젊은 시절 해외 출장 오가며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구미 선진국, 아시아에서는 혼자서만 잘 나가던 일본의 풍경을 그날 수원에서 보았습니다. 

아, 우리도 이렇게 사는 날이 있구나!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까지도 분유, 설탕, 강냉이죽과 빵을 배급받으며 살았었는데. 문득 초등 1년생 때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배급받은 죽통을 들고 가는데 저 멀리서 담임선생님이 마주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창피해서 얼른 죽통을 옆 골목에다 숨겨 두고 나와 인사드렸었지요. 


수원 화성 지도
건축미를 뽐내던 수원 화성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란을 겪으며 성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축성 때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남아 있어 나라 살림이 피어나던 1975~1979년 그 의궤에 따라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남문인 팔달문(八達門), 서문인 화서문(華西門), 북문인 장안문(長安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방화수류정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002 월드컵축구대회의 유치가 확정된 이듬해인 1997년 12월 수원 화성은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었음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수원에서 비롯된 ‘화장실문화 혁명’과 함께 화성이 전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귀가하는 찻간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허물어진 역사 문화 유적을 되세우고, 경제를 살리고, 환경을 가꿔 온 이들에 대해 새삼 깊은 감사를 느꼈습니다.
 

 

생손앓이에 정신 팔 때가 아니다

2024년 11월 26일

생손앓이! 혹시 그런 거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겨우 손가락 끝에 생긴 작은 고장이지만 그 고통과 불편은 말도 못 할 정도랍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통증은 다음이고 정신까지 혼미해지지요. 앓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모릅니다. 


어릴 때 눈물 찔끔거리는 아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배추김치 폭을 찢어 손가락을 싸서 헝겊으로 감아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소금에 절인 배추김치의 염분이 곪은 손가락을 낫게 하는 건지, 그저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의학 사전에는 표저(생인손瘭 등창疽, 또는 불똥熛 등창疽)라는 어려운 말을 썼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말로는 생손, 생인손이라고도 하니까요. 보통 손가락 끝의 외상으로 감염되어 독이 기부(肌膚, 살가죽)와 근맥(筋脈, 힘줄과 핏줄)에 들어가는 것이랍니다.  


손가락 끝이 곪으며 앓게 되는 생손앓이.
처음에는 벌건 점이 생겼다가 점차 부으면서 검은빛이 되고, 화끈 달아오르면서 아픔이 심하고 오슬오슬 추우면서 열이 납니다. 심하면 근육과 뼈까지 상하고 손톱이 빠지기도 한답니다. 이렇게 수선스럽게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결코 만만찮은 고장임을 알 만합니다.

생손앓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꼭 알고 싶다면 한 번쯤 앓아 봐도 좋을 겁니다. 죽는 병은 아니니까요. 그래서인지 짐짓 위로해 주는 척하며 짓궂은 장난으로 골려 먹는 친구들도 있답니다. “거 무척 아프겠다.” 하면서 일부러 슬쩍 건드려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드는 고약한 짓이지요. 

친구의 산장에 놀러 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도끼로 화덕에 넣을 장작을 패며 힘 자랑하던 친구가 슬그머니 도끼를 내려놓으며 물러섰습니다. 갑자기 팔에서 힘이 빠지더랍니다. 그보다 친구는 손톱 밑에 박인 가느다란 나무 가시 때문에 저녁 내내 끙끙 앓았습니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온 친구는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손톱 밑의 가시, 그 통증도 이해할 만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하다 일경에 끌려간 지사들이 당한 가장 혹심한 고문 중 하나가 손톱 밑 바늘 찌르기였다니까요.

며칠 후 친구는 저녁을 먹다가 이번엔 숟가락을 떨어뜨렸답니다. 그제야 친구는 몸에 발생한 더 큰 고장의 신호를 눈치챘습니다. 다음 날 곧바로 정밀검사를 받고 뇌수술에 들어갔습니다. 두개골을 열고 뇌 속에 터지기 직전으로 부풀어 오른 혈관의 꽈리를 잘라내고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람의 건강도 사회의 건강도 자신들 모르게 큰 위험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 사회도 지금 생손앓이에 정신이 팔려 정작 위험한 뇌경색 기미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뇌물이든 거짓이든 죄지은 사람은 법대로 처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라고 경찰, 검찰, 법원이 있는 게 아닙니까? 온 나라가 거기에 정신을 쏟고 열을 올릴 때가 아닙니다. 꽃다발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마땅한 선물입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수사, 재판 때마다 검찰청, 법원 앞에 줄을 잇는 화환들
지금 우리는 푸틴, 시진핑, 트럼프, 김정은 등 기인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일으키는 풍파를 어떻게 견딜지, 만만찮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협력의 대상으로든 경쟁의 대상으로든 만만한 상대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천일(千日)을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년 2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분쟁은 확전 일로에 있습니다. 결코 우리와 무관치 않은 비상 상황들입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자급자족이 아니라 교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국가 경제와 안보에 엄청난 위급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손가락 발가락의 가려움이나 통증에만 신경을 쏟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국부(局部)의 말초적(末梢的) 통증에만 매달려, 아니 정치꾼들의 농간에 휘둘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큰 병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연말연시에 보는 광대극

2024년 12월 27일

 

탁한 공기와 소음에 진저리를 내던 도시 처녀가 어느 날 풍광 좋은 곳을 찾아 시골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거진 수풀, 들꽃 흐드러진 벌판,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시냇물, 모든 게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그러다 누런 소를 이끌고 밭을 가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 광경도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농촌에서 살고 싶어!” 

그렇게 들떠 있던 처녀가 농부의 집으로 초대되었습니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외양간의 여물과 돼지우리의 퀴퀴한 냄새, 어디선가 흘러드는 거름통 냄새에 처녀는 코를 감싸 쥐었습니다. “아, 이런 냄새는 정말 싫어!” 농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가씨, 냄새도 안 나고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한 농촌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좋고 나쁜 게 있기 마련이지요.” 

한강은 노벨살 수상식에서 또 한 번 생명 존중을 노래했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고요. 가느다란 눈에 가냘픈 목소리가 더욱 처연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크고 작은 마찰과 분쟁은 거의 숙명입니다. 생명의 존엄은 4.3에서건 5.18에서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큰 충돌에서 생명의 파괴는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맙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좀 더 일찍 상황에 대비하지 못했는지, 그게 더욱 중요한 일이겠지요. 

우리에겐 동족상잔의 참극 6.25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하고, 수백만이 죽거나 다치고, 천만 이상이 난민으로 이산가족으로 모진 고통을 받았습니다. 보다 근원적인, 더 큰 비극을 외면하고 그 여파로 빚어진 사건들을 시대의 아픔으로 되새기는 풍조는 세대 차이 때문일까요. 하긴 한강을 제쳐두고 청계천을 노래한다고 탓할 수도 없겠지요. 

연말연시 우리는 뜻하지 않은 분란과 혼란 속에 빠져 있습니다. 국회가 하고한 날 탄핵과 특검을 부르짖으며 정부의 목을 옥죄더니 궁지에 몰린 대통령이 발작하듯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상황과 인식의 불일치로 빚어진 공황 상태, 아니면 환각 상태였을까요. 이제는 국가 혼란을 막겠다던 대통령이 도리어 탄핵의 도마에 올라 있습니다. 여우 무리의 덫에 빠진 곰 꼴이 따로 없습니다. 마치 광대극을 보는 기분입니다. 

광대극을 연기하는 배우들만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희극(비극?)을 무대에 올린 연출자가 더 큰 책임을 느껴야겠지요. 대통령을 뽑은 것도 국민, 국회의원을 뽑은 것도 국민입니다. 그들을 무대에 올린 주체가 바로 우리 국민입니다. 그러니 이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국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걸핏하면 우리 정치를 4류라고 비웃곤 합니다. 그러나 4류 정치의 무대를 만드는 것 역시 국민의 책임일 것입니다.

너무 자책하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어지러움은 우리나 남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선진 민주국가라고 으스대는 미국의 정치판만 해도 우리보다 크게 나을 게 없어 보입니다.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 지지자들을 선동해 의회를 짓밟고 난장판을 만들며 사람을 죽이고도 그 주모자가 2024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찾은 권력으로 수감된 난동자들은 즉각 사면하고, 난동을 조사한 사람들은 감옥에 처넣겠답니다.

재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공격에 가담한 자신의 지지자들이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다”면서 백악관에 돌아가는 첫날(2025년 1월 20일) 곧바로 그들을 사면할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또 ‘의회 공격’ 사건을 조사한 하원 위원회 일부가 수집된 증거를 파기하고 거짓말을 했다며 그들이야말로 감옥에 가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4년 임기 연임에 이어 6년 임기 연임으로 20년을 채우고도 다시 6년 임기 연임으로 영구집권의 길을 연 ‘현대판 차르’ 푸틴, 5년 임기 연임 초과 집권을 금지해 온 헌법을 뜯어고쳐 장기집권을 꿈꾸는 시진핑, 3대 세습에 고모부를 기관총으로 사살하고 형을 독살하고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김정은… 그런 비상식적 인물들이 지배하는 나라 말고도 세상엔 비정상으로 굴러가는 나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정치만 특별히 4류라고 자책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